집에서 불나자 홀로 사는 할아버지 대피시키고 숨진 20대 손자

중앙일보

입력

2일 오전 4시쯤 충북 청주시 서원구 사직동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1명이 숨지고 43명이 병원 치료를 받았다. [연합뉴스]

2일 오전 4시쯤 충북 청주시 서원구 사직동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1명이 숨지고 43명이 병원 치료를 받았다. [연합뉴스]

혼자 사는 할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집을 찾았던 20대 손자가 불이 나자 할아버지를 먼저 대피시킨 뒤 숨졌다.

청주 25층 아파트서 불…1명 숨지고 94명 연기흡입 #80대 할아버지 외로움 달래려 집 찾았던 대학생 참변 #주민들 "효심 깊은 청년 사고 당해 안타까워"

청주서부소방서에 따르면 2일 오전 4시8분쯤 충북 청주시 서원구 사직동의 25층짜리 아파트 3층에서 불이 났다. 이 불로 발화지점인 3층 집에서 불을 끄려던 대학생 김모(24)씨가 숨지고, 아파트 주민 94명이 연기를 흡입했다. 이중 호흡기 이상을 호소한 주민 46명이 병원 치료를 마쳤다. 김씨는 나중에 아파트 안방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불은 신고 접수 약 40분 만에 완전히 꺼졌다.

경찰은 숨진 김씨가 방에서 불이 나자 함께 있던 외할아버지(80)를 먼저 대피시키고 불을 끄려다 변을 당한 것으로 보고있다. 김씨의 할아버지는 경찰에서 “오전 4시쯤 잠에서 깨 거실에 나왔는데, 손자가 자고 있던 방에서 ‘탁탁’ 소리가 나서 문을 열어보니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며 “손자가 ‘불을 끌 테니 할아버지는 먼저 나가서 신고를 해달라’고 말했다. 이후 손자가 연기 때문에 탈출하지 못한 것 같다”고 진술했다.

사고 소식을 들은 아파트 주민들은 “효성이 지극했던 학생이 사고를 당해 안타깝다”고 입을 모았다. 지인들에 따르면 김씨는 3년전 지병으로 할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일주일에 4~5번씩 할아버지 집을 찾았다. 할아버지와 저녁 식사를 하거나 함께 잤다고 한다. 이 아파트 같은 동 위층에는 김씨와 그의 부모, 여동생 등 4명이 살고 있다. 한 주민은 “김씨 가족이 홀로 남은 할아버지가 적적하지 않게 돌아가면서 식사도 하고 잠을 잤던 거로 알고 있다”며 “숨진 김씨가 유독 할아버지 집을 자주 찾았다”고 말했다.

2일 오전 청주시 서원구 25층짜리 아파트에서 불이 나 주민들이 대피해 화재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2일 오전 청주시 서원구 25층짜리 아파트에서 불이 나 주민들이 대피해 화재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김씨의 장례식장을 찾은 친구들도 침통한 모습이었다. 김씨의 친구 서모(25)씨는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밥도 해먹고, 풋살을 좋아해 따르는 후배들도 많았다”며 “지난 3월 아기를 출산했을 때 친구가 분유 제조기를 선물로 줬는데 아기를 볼 때마다 친구 생각이 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 친구라면 할아버지를 먼저 대피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기를 마신 김씨의 할아버지는 현재 병원에 입원해 치료 중이다.

소방당국은 이날 화재가 스프링클러가 없는 3층 안방에서 시작한 것으로 확인했다. 이 아파트는 16층 이상에만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다. 2005년 소방법이 강화돼 11층 이상 모든 아파트 층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도록 바뀌었지만, 불이 난 아파트는 2004년 12월 건축허가가 난 건물이라 적용되지 않았다. 화재 당시 아파트 화재경보기는 울렸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화재로 130㎡ 규모 아파트 3층이 모두 타 소방서 추산 7000만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경찰관계자는 “현재까지 방화에 의한 혐의점은 발견되지 않았다”며 “전기적 요인으로 인한 화재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화재 원인은 정밀감식 결과가 나와봐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청주=최종권 기자 choig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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