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은내친구] 보았는가 '빗장수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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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의 준결승에서 경기 종료 1분을 남기고 결승골을 터뜨린 이탈리아의 파비오 그로소(左)가 기쁨에 겨워 그라운드를 질주하고 있다. 오른쪽은 쐐기골을 터뜨린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도르트문트 로이터=연합뉴스]

'카데나치오(빗장수비)'는 이탈리아 수비의 대명사다. 3~4명의 수비수가 일자로 서고 그 뒤에 한 명의 스위퍼가 수비벽을 뚫고 들어오는 상대 공격수를 '쓸어 담는' 것이 전통적인 카데나치오의 방식이다.

하지만 현재는 이탈리아도 스위퍼를 없애고 포(4)백 일자 수비를 구사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현재 이탈리아의 수비는 카데나치오가 아니다.

그렇지만 카데나치오는 여전히 이탈리아 수비의 우월함을 상징하는 수식어로 남아 있다. 5일(한국시간) 독일과의 준결승전은 물론 독일 월드컵을 통해 보여준 이탈리아의 수비는 카데나치오의 전통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시작은 불안했다. 이탈리아 수비의 대명사인 '터줏대감' 파올로 말디니가 은퇴한 상태에서 수비의 핵심 알레산드로 네스타와 잔루카 참브로타가 개막 직전에 다쳤다. 네스타는 6경기 중 3경기밖에 나서지 못했다. 4명의 수비수 중 주장 파비오 칸나바로를 제외한 나머지는 퇴장과 부상 등으로 번갈아 출전해야 했다. 어수선한 상황이 계속 됐다.

하지만 누가 나서든 이탈리아 수비는 변함없이 '철벽'이었다. 미국과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미드필더 다니엘레 데로시가, 호주와의 16강전에서는 중앙 수비수 마르코 마테라치가 퇴장당했지만 그래도 수비는 흔들리지 않았다.

선수 시절 아시아를 대표하는 수비수로 명성을 날렸던 김호 전 대표팀 감독은 "상대가 어느 방향으로 공격하든 항상 2대 1의 수적 우위를 유지했다. 공을 뺏으면 곧바로 인근의 동료에게 연결해 순식간에 역습을 전개했다"고 이탈리아 수비를 평가했다. 포(4)백 수비로 성남 일화의 K-리그 전기리그 우승을 이끈 김학범 감독은 "이탈리아 수비들은 항상 패스의 길목을 차단했다. 상대는 공격 횟수가 많아도 실속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같이 기계처럼 짜인 수비 조직력으로 이탈리아는 독일 월드컵 6경기 동안 1점만 내줬다. 그것도 미국전에서 나온 수비수의 자책골이었다. 미국의 유효 슈팅(골문 안을 향한 슛)은 단 한 개도 없었다. 6경기 동안 상대가 이탈리아 수비를 뚫고 넣은 골이 없었다는 말이다.

수비 불안은 한국 대표팀의 고질병 중 하나다. 이탈리아와 한국 수비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개인 기량의 차이를 지적한다.

김학범 감독은 "압박과 협력수비도 개인 기량이 따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상대방과의 1대 1에서 뚫리는 것은 전술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전 국가대표 수비수 출신인 안익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은 "상황 인지능력과 대처능력에서 (이탈리아와) 차이가 난다. 상대를 놓고 어느 지점에 설 것인가, 공을 뺏지 않고 견제하는 요령, 기술적으로 파울을 범하는 요령 등을 어려서부터 체계적으로 익혀야 차이를 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월드컵이 끝날 때마다 포지션별 특화 프로그램이 나왔지만 현장에서 실행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김호 전 감독 역시 "전술과 훈련 방법을 중장기적으로 개발하지 않는다면 극복할 수 없는 차이"라고 밝혔다.

독일 월드컵에서 보여준 이탈리아 축구는 수비 축구가 아니다. 마르첼로 리피 감독은 공격에 무게를 둬 대표팀을 운영해 왔다. 이 '공격 철학'의 충실한 이행자도 수비진이었다. 독일전 결승골의 주인공은 위력적인 오버래핑을 구사한 왼쪽 윙백 파비오 그로소였다. 우크라이나와의 8강전에서는 오른쪽 윙백 참브로타가 결승골을 넣고 쐐기골을 도왔다.

조별리그 체코전 결승골의 주인공도 수비수 마테라치였다. 6경기에서 넣은 11골 중 4골이 수비수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충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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