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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4월 수상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장원>

항해일기
-김나경

올라가고 내려가고 쉼 없이 움직이다가
한숨 돌리느라 갑판으로 나가 본다
눈 끝을 째리고 있는 저 하늘 강한 햇빛

내 손에 들려있는 망치와 스패너가
햇살을 맞받으며 은빛을 내뿜는다
뜨겁게 반짝거린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빛이 강할수록 바다는 깊어진다는
물길의 가르침을 오늘에야 어렴풋이
두어 뼘 휴식이 주는 충전을 비축한다

파도가 헉헉대며 물꽃을 피워 물 때
그 물결 눈높이로 불러보는 서해 바다
수평선 맞닿은 거기, 꿈자리가 봉긋하다

◆김나경

김나경

김나경

1994년 서울생. 해군 부사관 복무, 현재 간호대학교 재학 중. 고등학교 재학 시절 중앙시조백일장 차상.

<차상>

감자
-이주식

낮달 같은 씨감자가 눈 또릿 도사린다
춘분 밝은 햇살 아래 탱그런 몸짓으로
꿈꾸던 초록 함성을 호미 끝에 불러낸다

꽃샘 추위 고비 넘어 애지중지 피워낸 잎
종달이 노래 따라 행복의 키를 키워
이웃집 청보리처럼 내 그늘도 만든다

단오절 북소리에 까투리 홰친 고랑
가지마다 꽃 등 켜고 뿌리 매단 푸네기들
청천에 그림 같은 삶 주고 갈 어미 봄을…

<차하>

엘리베이터에 갇혀
-류홍

암흑의 엘리베이터
28분 두려웠다

핸드폰 배터리는
깜박깜박 졸고 있고

막장에 정지된 시간
관(棺) 속에서 더듬는다

상가의 사람들은
모두들 퇴근했고

화요일은 수요일로
가지 못해 웅크리고

걸어온
계단 하나하나
다 무너져 내린다.

<이달의 심사평>

고심 끝에 김나경의 ‘항해일기’를 장원으로 뽑았다. 이 작품은 ‘망치와 스패너’로 상징되는 항해사의 역동적이고 낙관적인 삶과 튼실한 서정이 무엇보다 돋보인다. 게다가 작품 속에 구사된 언어들이 이와 같은 서정을 뒷받침하면서, 여기저기서 ‘뜨겁게 반짝’이고 있기도 하다. 같이 투고한 ‘역할’ 등의 작품들도 같은 경향을 지니고 있어, 더욱더 신뢰를 가지게 했다.

차상으로는 이주식의 ‘감자’를 뽑았다. ‘항해일기’가 패기 넘치는 역동적인 작품이라면, ‘감자’는 원숙하고도 격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우선 가락이 안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초록 함성”을 꿈꾸던 씨감자가 “가지마다 꽃 등 켜고” 열매를 달기까지의 과정이 잘 육화된 목소리로 형상화돼 있다. ‘또릿’ ‘탱그런’ ‘홰친’ ‘푸네기’ 등 일상에서 멀어진 고유어들도 인절미에 박힌 곶감처럼 씹는 맛을 더하게 했다. 차하로 뽑은 류홍의 ‘엘리베이터에 갇혀’는 난데없이 당한 공포의 순간을 시적 구도 속에 포착한 작품인데, 좀 더 참신하고도 개성적인 표현을 할 수는 없었을까 아쉬웠다.

심사위원: 염창권, 이종문(대표집필)

<초대시조>

막사발
-이남순

왜바람과 맞서느라 금이 간 허리 안고
이저리 채이다가 이 빠지고 살 터진 채
이름도 개명을 했다, 꼼짝없이 ‘이도 다완’

선비들의 찻상에도 의젓하게 올라갔고
비가 새는 난달 부엌 흙바닥에 엎드려서
저 백민 간당한 목숨도 숨죽이며 지켜봤다

장독 위에 별을 띄워 정화수 받아 놓고
퇴락한 왕조 앞에 그래도 살아보자고
어쩌다 비겁한 목숨도 그렁그렁 달래었다

개밥그릇 냉가슴도 참을 말이 따로 있지
분에 넘친 대접하며 기고만장 해봤댔자
우리네 도공 품에서 주먹 쥐고 태어났다

◆이남순

이남순

이남순

1957년 경남 함안 출생. 2008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조집 『민들레 편지』. 박종화문학상 수상.

언어는 사유를 담는 그릇이다. 그 그릇의 크기와 모양, 그것이 놓인 위치에 따라 저장했다 꺼내는 말의 맛이 다르다. 하루하루 ‘막-’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이 시고 짜고 맵고 떫은 것은 각자의 그릇에서 꺼내는 말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남순 시인의 ‘막사발’이 품어내는 그 맛도 이와 다르지 않다. 화자는 섬세한 촉수를 뻗어 막사발이 놓인 위치와 용도를 더듬고 있다. ‘개밥그릇 냉가슴’과 ‘이도 다완 기고만장’을 대비시킨 것은 절묘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4연은 1, 2, 3연의 결론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이도 다완, 찻잔, 정화수 잔, 개밥그릇은 그 맥락이 갖는 명분과 실존적 위치가 어떻든 막사발의 다른 이름이다. 화자의 시선은 ‘개명’을 하여 짐짓 폼 잡고 있는 ‘이도 다완’이 아니라 ‘이 빠지고 살 터진’ 막사발을 찾고 있다. ‘선비들의 찻상’에 오르거나, ‘난달 부엌 흙바닥에 엎드려’ 있어도 막사발의 그 근본과 품새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서, 산전수전 다 겪은 화자의 눈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의 외양이 아무리 허풍과 허세로 치장해가며 기고만장 해봤댔자 이미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일 뿐이다. 막사발이 놓인 이력을 따라가다 보니 덜컥! 가식과 허세로 포장한 내 얼굴의 근본이 물에 비친다. 이거 참! 부끄럽구나!

김삼환 시조시인

◆응모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우편(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또는 e메일(won.minji@joongang.co.kr)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02-751-5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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