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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초당적 통일 정책 비결은 공존 지지한 여론의 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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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2호 15면

[배명복의 사람속으로] 『동독민 이주사』 쓴 최승완 박사

최승완 박사는 ’동독 사람들이 서독으로 넘어온 다양한 동기를 정치적 의미가 강조된 ‘이탈’이란 표현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어 ‘이주’란 표현을 썼다“고 설명했다. [신인섭 기자]

최승완 박사는 ’동독 사람들이 서독으로 넘어온 다양한 동기를 정치적 의미가 강조된 ‘이탈’이란 표현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어 ‘이주’란 표현을 썼다“고 설명했다. [신인섭 기자]

독일이 분단된 1949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89년까지 40년 동안 적게는 375만 명에서 많게는 475만 명의 동독 주민이 다양한 경로와 방법으로 서독으로 건너갔다. 무작정 월경(越境)한 사람도 있지만, 터널을 파거나 열기구를 타고 넘어간 사람도 있다. 그 과정에서 약 1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누구이고, 왜 또 어떻게 위험한 탈출을 감행했을까. 서독 정부는 이들 모두를 두 팔 벌려 환영했을까. 이들에 대한 정착 지원 제도는 처음부터 완벽했을까. 또 그들은 서독 사회에 문제없이 정착해 잘 살았을까.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맞아 동독 이탈 주민의 전모(全貌)를 다룬 책이 독일이 아닌 한국에서 나왔다. 동독 역사를 전공한 최승완(56) 박사가 쓴 『동독민 이주사』(서해문집)다. 독일 학자가 할 일을 한국 학자가 대신한 셈이다. 최 박사를 지난 16일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40년 간 최대 475만 명 서독행 #왜, 어떻게 왔고, 정착했는지 #발로 뛰며 자료 모으고 인터뷰 #동독 이탈 주민도 서독인 인정 #사회보장 제도의 틀로 흡수해 #서독 주민 불만과 피해의식 최소화 #이탈 주민은 분단 체제 가교 역 #정권 바뀌어도 정책 일관성 필요 #시민사회 체계적 지원도 큰 몫

동독사를 전공하게 된 배경이 우선 궁금하다.
“이화여대에서 석사 학위를 마치고, 독일 빌레펠트대로 유학 간 게 1989년 가을이다. 가자마자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고, 약 두 달 만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다. 이어 동독 정권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됐다. 역사적 격변을 지켜보며 동독의 붕괴 원인에 관심을 갖게 됐다. 분단이라는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동독사를 전공하게 됐다.”

독일 학자가 할 일 한국인이 해낸 셈

동독 역사를 전공한 최승완 박사가 펴낸 『동독민 이주사』.

동독 역사를 전공한 최승완 박사가 펴낸 『동독민 이주사』.

특별히 동독 이탈 주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독일의 사례를 연구하면 탈북민 문제에 참고할 게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보다 더 직접적인 것은 동독 이탈 주민에 관한 자료나 정보를 접하며 느낀 아쉬움과 문제점 때문이었다. 그들에 관한 언론 보도나 보고서, 논문은 많이 있지만, 도대체 그 사람들이 왜, 어떻게 왔고, 어떻게 정착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정보가 없었다. 관련 법이나 제도만 나열돼 있을 뿐, 이들의 정착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됐는지, 아니면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회과학적 방법론 위주로 접근한 탓에 역사적 접근이 부족했던 데 원인이 있다고 판단해 동독 주민 이탈 40년 역사 전반을 다룬 개론서를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를 위해 최 박사는 수년간 발품을 팔며 학자가 할 일과 기자가 할 일을 동시에 수행했다. 독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문서 보관소를 찾아가 자료를 뒤졌고, 동독 이탈 주민들을 만나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다.

독일에도 아직 그런 개론서가 없다는 얘긴가.
“안타깝지만, 그렇다.”
당연히 독일어판 출간도 계획하고 있을 것 같다.
“박사 과정을 지도했던 교수님이 제안을 하긴 했다.”

동독의 체제 비판 세력을 다룬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단일 이슈그룹에서 민주화 세력으로』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독일에서 출간됐다.

동독 주민의 대량 이탈 때문에 동독이 붕괴했다고 보나.
“89년의 대량 이탈 사태가 동독 붕괴로 이어지는 대변혁의 기폭제가 된 건 맞다. 그렇다고 동독 주민의 이탈을 동독 붕괴로 바로 연결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동독 주민 이탈 문제에 주목한 것은 수백만 명이 동독을 떠났다는 사실 자체가 동독 체제가 가진 근본적 모순의 징표라고 봤기 때문이다. 동독 체제의 문제를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눈을 통해 좀 더 미시적으로 접근하면 동독 사회주의 체제가 왜 위기에 직면했고, 동독 정부는 왜 붕괴를 막지 못했는지를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탈과 이주는 의미가 다르다. 책 제목을 『동독민 이주사』로 정한 이유는?
“이탈이란 것도 크게 보면 이주의 범주에 포함시켜서 볼 수 있지 않을까. 동독 사람들이 서독으로 넘어온 이유는 굉장히 다양하다. 정치적 탄압 때문에 온 사람도 있지만, 경제적 이유에서 온 사람도 있고, 환경 오염 때문에 온 사람도 있다. 심지어 바람이 나서 온 사람도 있다. 정치적 의미가 강조된 이탈이란 표현만으로는 이런 다양한 동기를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이주란 표현을 쓴 것이다.”
1989년 동독민의 서독행 러시는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로 이어졌다. [중앙포토]

1989년 동독민의 서독행 러시는 11월 9일 베를린장벽 붕괴로 이어졌다. [중앙포토]

‘탈북자’란 표현을 어떻게 생각하나.
“다분히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표현이 아닌가 싶다. 요즘 북에서 남으로 오는 분들의 탈출 동기도 상당히 다양해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자녀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서 온 분들도 있다고 들었다. 이들 모두를 탈북자의 틀에 가둘 필요가 있을까.”
그럼 적절한 용어로 뭐가 좋을까.
“북한 이탈 주민이라고 하던가, 아니면 남북 관계의 앞날까지 고려해 북한 이주민이라는 표현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탈북자라고 하면 왠지 북한 체제에 저항하고, 그 체제와 결별한 사람들이란 느낌을 준다. 그런 강요된 정체성을 갖고 그들이 과연 남한 사회에서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동독 이탈 주민을 보는 서독 사회의 시각은 어땠나.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달랐다. 경기가 나빠지거나 실업률이 올라가면 세금을 축내고, 일자리를 빼앗는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시각이 강했다. 서독 경제가 좋을 때는 노동력 부족을 메워주는 고마운 존재로 여기기도 했다. 그들을 동포·형제로 보면서도 간첩이나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동서독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지 않았고, 군사적 갈등이나 대립의 정도가 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남북한과 큰 차이가 있다. 이탈 주민을 적극적으로 포용하는 정책을 쓸 수 있는 여지가 우리보다 컸던 셈이다.”
정당 간에도 시각차가 있었나.
“동포애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이탈 주민을 수용하고, 정착을 지원해야 한다는 원칙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얼마나 수용하고, 어느 선까지 지원할 것인가 하는 세부적인 면에서는 정당 간에 차이가 있었다. 서독 체제의 우위를 입증하는 정치적 의미를 강하게 부여한 기민당 등 보수 정당은 정치적 난민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엄격한 입장을 보인 반면 사민당 같은 진보 정당은 정치적 탄압 여부와 관계없이 다 받아들여 차별 없이 정착 지원을 해야 한다는 관대한 입장이었다.”
독일 정치권의 초당적 통일 정책은 어떻게 가능했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50~60년대 기민당의 콘라트 아데나워 정부는 ‘강자의 정책’을 추구했다. 서독의 적극적인 서방 편입과 국력 배양을 통해 동독을 고립시키고, 굴복시켜 힘의 논리로 통일을 실현한다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신(新)동방정책을 표방한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정부가 70년대 들어 대립에서 공존으로 노선을 바꾸고, 80년대 집권한 기민당의 헬무트 콜 정부가 사민당의 정책 노선을 계승하면서 초당적 컨센서스가 이루어졌다. 72년 사민당이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만든 법적, 정치적 공존 구조를 서독 주민이 지지했기 때문에 콜도 그것을 뒤집을 순 없었다. 결국 여론의 힘이 초당적 통일 정책을 가능케 했다고 할 수 있다.”

탈북자보다 ‘북한 이주민’ 표현이 적절

사민당이 대립보다 공존을 택하게 된 배경은 뭔가.
“동독이 일방적으로 설치한 베를린 장벽이 결정적이었다. 힘으로 누르면 동독이 굴복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동독은 굴복 대신 봉쇄를 택했고, 이후 동독 체제는 안정화하고 공고해졌다. 굴복을 통한 통일이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면서 ‘접근을 통한 변화’를 유도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꿨다.”
탈북자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독일에서 배울 점은?
“수백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큰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서독 주민이 느낄 수 있는 불만과 피해 의식을 서독 정부가 적절히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 이탈 주민을 똑같은 서독 주민으로 인정하고, 서독 주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사회보장 제도의 틀로 그들을 흡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 결과 이탈 주민만을 위한 별도의 예산 편성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정권이나 정세가 달라져도 일관성 있는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이탈 주민들이 신변에 대한 불안감 없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한 점이다. 북한 이탈 주민들은 남북한 체제를 다 경험한 사람들이다. 앞으로 남북 관계가 바뀌면 동독 이탈 주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남과 북을 잇는 가교 내지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 주민 정착과 관련해 서독 시민사회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다.
“성금이나 생필품을 모아 물질적 지원을 한 것은 물론이고, 이탈 주민들이 취약할 수밖에 없는 법률적 문제에 대한 조언도 해줬다. 상담을 통해 그들의 소외감을 덜어주는 역할도 했다. 이탈 주민 문제를 서독 사회 전체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보고, 이벤트성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장기적으로 지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가 눈여겨볼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bae.myungb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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