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하나로 2시간 싸웠다···미·중 무역전쟁은 '번역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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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무역전쟁의 끝이 좀처럼 보이질 않는다. 3월 말 합의는 물 건너간 지 오래다. 이젠 4월이나 5월, 심지어 6월까지 장기화되리란 관측도 나온다. 뭐가 문제인가. 지식재산권 보호, 기술 강제이전, 중국의 합의 이행여부 점검 등 다양한 걸림돌이 존재한다.
그러나 최근 또 하나의 중요한 장애물이 떠올랐다. 언어 문제다. 합의문에 쓰일 영어와 중국어 간의 싸움이다. 단초는 중국 관방과 연결된 한 소셜 미디어 계정에서 나왔다. 계정은 중·미 협상 대표단이 현재 “글자 하나하나 문구 하나하나를 따지고 있다”고 전했다.

합의문에 들어갈 영어와 중국어 놓고 #단어 하나로 두 시간 싸우고도 결론 못내 #자국에 유리한 해석 위해 필사적 다툼 중

미·중이 합의문에 써 넣을 문구와 표현, 용어를 갖고 씨름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영어로 합의된 사항을 중국어로 어떻게 번역하느냐 문제를 갖고 양측이 치열한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12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마주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주석(왼쪽)은 무역전쟁에 대한 휴전을 선언했다. [AP]

지난해 12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마주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시진핑 중국 주석(왼쪽)은 무역전쟁에 대한 휴전을 선언했다. [AP]

홍콩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사적인 조언을 제공하고 있는 마이클 필스베리 미 허드슨연구소 중국전문 연구원도 최근 미·중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로 영어와 중국어의 해석 차이에서 오는 오해를 지적했다.

그는 현재 미·중이 만들고 있는 120쪽 분량의 합의안 초안에 중국어 버전이 없다며 이는 나중에 해석의 문제를 놓고 양국이 서로 다른 소리를 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아예 협상 단계에서부터 중국어 버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똑 같은 사안에 대한 영어와 중국어 표현을 두고 미·중이 각기 자신에게 편리하게 해석한 대표적인 예로는 2001년 중국 하이난다오(海南島) 상공에서 미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가 충돌해 중국 조종사가 사망한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미국은 ‘깊은 유감(deep regret, 深表遺憾)’을 표했다. 공식 사과가 아닌 애도와 유감의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이를 ‘깊은 미안함(very sorry, 深表歉意)’으로 발표했다. 미국이 공식 사과했다는 것이다. (『한국인을 위한 미중 관계사』, 주재우)

이를 의식한 듯 미국은 이번 중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중국어 자구(字句) 하나하나를 따지고 있다. 최근 미·중 대표단이 농업 분야 협상에서 단어 하나의 쓰임새를 갖고 두 시간 가량 다투다 결론을 내지 못한 채 결국 나중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고 한다.

미국 협상 대표단의 인원이 최근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연초인 1월 7일 미 대표단이 베이징을 찾았을 때는 24명이었는데 2월 11일 다시 베이징을 방문했을 당시엔 두 배가 넘는 59명이나 됐다는 것이다.

류허(劉鶴) 중국 부총리

류허(劉鶴) 중국 부총리

중국도 언어 싸움에선 절대 밀릴 수 없는 입장이다. 홍콩의 정치 평론가 쑨자예(孫嘉業)는 “트럼프 대통령이 합의문 영문판에서 ‘대승’을 선언한다고 해도 중국은 개의치 않겠지만 중문판에선 ‘나라를 팔아먹지 않았다’고 해석할 여지를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게 중국의 절대적 입장”이라고 말한다.

중국이 일방적으로 양보한 합의문이 발표돼 중국 민간에서 국권 상실에 준하는 치욕을 당했다는 여론이 형성될 경우 중국 공산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의 위상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전쟁이 이젠 영어와 중국어 간의 언어 다툼으로까지 발전하며 미·중 패권전쟁의 본질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이번 주엔 류허(劉鶴) 중국 부총리가 미국으로 건너가 9차 고위급 회담을 갖는다. 영어와 중국어 싸움도 계속될 전망이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you.sangch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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