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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청와대는 추천만?…“누가 그 사람 떨어뜨리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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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박태인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박태인 사회팀 기자

박태인 사회팀 기자

“한번 살펴만 보라고 말했을 뿐이에요”

채용비리를 수사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낙하산’을 꽂았던 윗분들이 조사에서 주로 이런 말을 한 것으로 기억했다. “이름만 전달했다”로 시작한 진술은 “합격 여부만 알려달라고 했다”로 넘어가 “직원들이 나도 모르게 합격시켰다”로 정점을 찍는다고 했다.

말 한마디 건넸을 뿐인데 부하 직원들이 추천을 지시로 오해해 비리에 연루됐으니 억울하다는 푸념이다. 재판이 진행 중인 한 채용비리 사건에선 자신이 언급한 지원자 수십명의 점수가 조작됐음에도 구속된 부하직원들에게 “나는 몰랐다”고 말하는 회장님도 계시다.

하지만 이름을 건네받은 아랫사람들은 그분들의 추천을 다르게 기억했다. “반드시 합격시키라는 지시(공무원)”“누가 그 사람을 떨어뜨릴 수 있겠어요(공기업 직원)”라고 했다. 강요당한 동의, 일종의 위력(威力)이란 것이다. “신분이 보장된 공무원인데 원칙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한 공무원은 헛웃음을 치며 “바보가 아닌 이상 따라야지, 아니면 어떻게든 보복을 당하게 된다”고 답했다.

취재일기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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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부지검이 수사 중인 ‘환경부 산하기관 채용비리’ 의혹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청와대가 산하기관 임원 후보를 추천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환경부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핵심 쟁점이다. 검찰 조사를 받은 청와대 행정관들은 “청와대는 추천을 했을 뿐 채용비리 사실은 알지 못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고 한다. 사실상 부인이다.

하지만 환경부 공무원들은 청와대의 추천자를 무조건 합격시키려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전(前) 정부에서 임명된 임원들을 표적감사로 밀어낸 뒤 청와대 추천자들에게 면접 정보를 전달했다. 한 전직 공무원은 “청와대의 추천은 장관의 추천과는 무게감이 다르다”며 “청와대의 추천은 단순 추천으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검찰은 9개의 환경부 산하기관에 포진한 13명의 ‘캠코더(대선캠프·코드·더불어민주당)’ 출신 임원 상당수가 채용 특혜를 받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검찰은 지난해 7월 환경공단에서 발생한 일종의 ‘사고’에 주목하고 있다. 청와대가 상임감사로 추천한 전직 언론사 간부 박모씨가 서류전형도 통과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애초 서류 전형도 뚫지못할 후보를 추천한 것이 문제였지만 환경부 공무원들은 큰 사달이 난 것처럼 청와대에 탈락 경위를 보고했다고 한다. 환경부 차관은 이 문제로 청와대를 방문했고, 한달 뒤엔 경질됐다. 검찰 관계자는 “청와대가 단순히 추천만했다고 보기엔 납득하지 못할 장면이 여러곳에서 발견된다”고 했다.

검찰은 곧 관련 인사를 담당했던 신미숙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을 소환한다. 검찰은 신 비서관이 박모씨가 탈락한 뒤 환경부 공무원들을 질책하며 경위 보고를 요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신  비서관이 환경부 산하기관 인사 과정에서 추천과 사후 검증만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채용비리 사건과 유사한 패턴을 따르게 된다.

윗분(청와대)들은 그냥 이름만 전달한 것이고, 아랫사람(환경부)은 이 지시를 오해하고 설레발을 친 것이 된다. 환경부 공무원들은 자신들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캠프 출신 인사들의 합격을 위해 손과 발이 닳도록 뛰었고 합격시키지 못해 질책도 받았다. 그들은 청와대의 추천을 위력처럼 느꼈을 테지만 청와대는 위력이 아닌 추천이라 말하는 것이다.

박태인 사회팀 기자 park.tae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