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18%, 스페인14% 실업률에도 최저임금 11%, 22% 올린 파격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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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한 남자가 오토바이에 물건을 싣고 달리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한 남자가 오토바이에 물건을 싣고 달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일자리 상황이 좋지 않은데도 최저임금을 파격적으로 인상한 나라가 글로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 얘기가 아니다. 유럽의 경제 약체로 꼽히는 그리스와 스페인 이야기다.

낮은 경제성장률에 높은 실업률을 가진 그리스와 스페인의 좌파 성향 정부가 '정통 경제학(economic orthodoxy)'과는 반대되는 정책에 베팅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7일(현지시간) 전했다.

그리스와 스페인은 올해 들어 최저임금을 가파르게 인상했다. 거의 10년 만에 처음으로 최저임금을 인상한 그리스는 올해 11% 올렸다. 카페에서 일하는 종업원 월급이 586유로(약 75만3500원)에서 650유로(약 83만6000원)로 오르게 됐다.

스페인은 올 1월 최저임금을 22% 인상했다. 40년 만에 최대 인상이다. 최저임금이 월 736유로(약 94만6000원)에서 900유로(약 115만7000원)로 대폭 올랐다.

실업률이 높은 유럽에서도 두 나라 실업률은 독보적으로 더 높다. 유럽연합(EU) 통계서비스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지난 1월 그리스 실업률은 18.5%, 스페인은 14.1%이었다. 독일의 3.2%, 네덜란드의 3.6%는 물론 유로존 평균(7.8%)과 EU 평균(6.5%)보다도 두 배 이상 높다.

이처럼 높은 실업률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와 스페인의 좌파 정권은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성장과 고용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은 물론 지지층 결집에도 좋을 것이라며 이 같은 정책을 펴고 있다고 WSJ은 전했다.

그리스와 스페인 경제는 최악 상황에서 벗어나 성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중이다. 그리스는 8년에 걸친 국제 구제금융 지원에서 지난해 8월 졸업한 이후 경제가 서서히 회복 중이다. 역시 유로존의 도움으로 금융위기에서 벗어난 스페인 경제는 더 강력한 성장세를 보인다.

 지난해 12월 각료회의에 참석하는 스페인의 페드로 산체즈 총리. [epa=연합뉴스]

지난해 12월 각료회의에 참석하는 스페인의 페드로 산체즈 총리. [epa=연합뉴스]

금융 지원의 대가로 유로존 금융당국은 그리스와 스페인에 임금을 하향 조정해 고용을 늘리고 수출을 증대시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도리어 임금을 올림으로써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스페인은 오는 4월 28일, 그리스는 10월 선거를 앞두고 있다.

양국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소득이 올라가면 소비가 증가하고, 이로 인해 경제가 성장하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두 나라처럼 실업률이 높은 경우 최저임금 인상은 일자리를 더욱 감소시킬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파노스 차크로글로 아테네대 경제학과 교수는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은 최근 내려가고 있는 실업률을 다시 끌어올리거나 하락 추세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소비 증가는 그 영향이 매우 단기에 머무를 것"이라면서 "신고하지 않은 노동 행위가 증가하고, 수출 증가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등 경쟁력을 저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정부 정책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주장은 다르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싱크탱크인 푼카스의 레이몬드 토레스 이코노미스트는 "오른 월급은 소비를 증가시키고, 이는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저임금 인상이 보다 완만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리스와 스페인 모두 최저임금이 중위 소득의 60% 이하 수준인 만큼 임금 인상 폭을 경제가 충분히 흡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페인은 지난해 최저임금을 4% 인상했다. 2017년에는 8% 인상했다. 연속 인상에도 실업률 하락 추세가 멈추지 않자 정부는 더 자신감을 갖고 밀어붙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강력한 경제성장 여건 속에서 완만한 최저임금 인상은 고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영미권 경제학계는 설명하고 있다. 2014년 최저임금을 도입한 독일의 경우 고용률 증가 추세가 줄어들지 않은 게 좋은 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인상 폭과 경제 여건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 경제가 얼마나 강하게 성장 중이냐에 따라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효과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WSJ이 소개한 스페인과 그리스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다.

경제 성장세는 스페인이 더 강력하다. 지난해 그리스 성장률은 전망치보다 약간 낮은 1.9%였다. 스페인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 연속 -3% 이상 성장한 데 이어 지난해 성장률은 2.5%로 전망된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카페 3개를 운영하는 마르코 바르콜로미 사장은 "주머니가 22% 더 두둑해진 사람들이 커피와 외식에 돈을 더 많이 쓸 것이기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이 사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음식점을 하는 바실리스 바빌로사키스는 "최저임금 인상 부담이 커서 직원 한 명을 추가 고용하려던 계획을 보류했다"고 말했다.

그리스의 한 카페에서 일하는 에반젤리아 코스키나는 WSJ 인터뷰에서 "6년 만에 월급이 올라 기쁘지만, 사장님은 나를 포함한 직원 4명 월급 인상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조만간 몇 년 만에 가격을 인상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페인 중앙은행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올해 일자리 12만5000개가 사라질 것으로 추산했다. 그리스 중앙은행은 최저임금은 노동 생산성과 동시에 올라가야 한다고 밝혔다.

문제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일자리 '충격파'가 취약계층을 더욱 세게 때린다는 점이다. 스페인 싱크탱크 페디아의 노동경제학자 마르셀 잰슨은 "최저임금 인상은 고학력 성인 근로자에게 영향을 주는 게 아니라 그 아래쪽에 취약 계층이 일자리를 찾거나 유지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게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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