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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소프트파워

나눔의 바다를 이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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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주 제 눈에 비친 뉴스 중 뉴스는 워런 버핏의 374억 달러 기부약정 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들여다볼수록 적잖은 충격이었고, 나눔에 인색했던 저 자신에 대한 소리 없는 채찍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만나본 어느 재벌 총수는 워런 버핏의 천문학적 기부약정 소식을 접하고 내심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선친으로부터 기업을 물려받을 때 당시로선 가장 많은 상속세를 냈던 사람입니다. 그는 바다 건너 워런 버핏의 천문학적 기부약정이 자칫 우리 사회에서 더욱 노골적인 기업 압박의 분위기로 변질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사실 8000억원이니 1조원이니 하며 국내 1, 2위 기업이 내놓은 돈이 흔쾌하게 나왔다기보다는 왠지 손 비틀려서 나온 것 아니냐는 세간의 인식이 여전한 가운데 워런 버핏이 자기 전 재산의 85%를 기부하겠다고 약정한 것은 우리 기업에 적잖은 심적 부담을 가중시킬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워런 버핏의 소식을 접하고 사람들은 나도 뭔가 나눠야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큰돈 있는 사람, 큰 기업이 더 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 분위기가 역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의 깊게 봐야 할 사실은 이미 우리의 기부문화가 지나치게 기업 의존적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보이지 않는 선행의 작은 손'들이 해마다 늘어나고는 있지만 아직도 개인 대 기업의 기부금 기여도는 3대 7 정도입니다. 미국의 8 대 2, 일본의 9대 1에 비하면 여전히 우리의 기부문화가 '눈에 띄는 큰손과 기업'들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워런 버핏의 374억 달러라는 그 천문학적 기부금조차 미국의 연간 기부금 액수인 2000억 달러의 5분의 1에도 못 미친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워런 버핏이 5년간 분할해 기부할 계획임을 감안하면 실제 연간 기부액은 75억 달러 정도가 되는 셈인데, 이것은 미국의 연간 기부 총액의 25분의 1이 채 안 되는 금액입니다. 결국 세상을 놀라게 한 워런 버핏의 기부금도 사실은 미국이란 거대한 나눔의 바다 위에서 보면 여러 척의 나눔의 배 중 하나일 뿐입니다. 물론 아주 큰 배이긴 하지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지난해 우리나라의 총 기부 액수는 2147억원입니다. 그런데 올해 삼성과 현대자동차 두 기업에서만 내놓기로 한 것이 1조8000억원인데 이는 2005년 총 기부액의 여덟 배가 훨씬 넘는 액수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이 말라 바닥이 드러난 나눔의 바다 위에 큰 배 두 척이 오도가도 못하고 얹혀 있는 형국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결국 기업이 내놓을 돈을 정부가 교통정리해 쓰겠다며 그 덩치 큰 나눔의 배가 산으로 간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큰 나눔의 배를 제대로 띄울 요량이라면 먼저 말라버린 나눔의 바다를 우리 손으로 채워야 합니다. 큰손의 기업들에만 나눔의 역할을 기대하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작은 내 손이 먼저 나눔에 동참해야 합니다. 나눔은 그 자체로 함께 공유(share)되어야지, 나누는 쪽과 구경만 하는 쪽으로 분할(separate)되어선 안 됩니다.

게다가 나눔의 바다는 반드시 돈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나눌 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빵가게와 음식점 주인은 빵과 음식으로, 변호사.교수.의사 등은 자신의 능력과 지식과 시간으로, 목수는 땀으로, 작가는 책으로, 예술가는 작품과 공연으로, 주부는 살림기술과 봉사로 누구나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작은 나눔의 물살이 되어 나눔의 큰 바다를 이뤄 봅시다. 세상은 그만큼 아름답고 살맛나게 될 겁니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