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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절망 않기 위해 희망하지 않는 신인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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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오늘의 작가상' 30회 수상작이 발표됐다. 이문열.한수산.박영한.강석경 등 쟁쟁한 작가를 배출한 전통의 문학상이지만, 근년엔 크게 부각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올핸 다르다. 화젯거리가 있다. 지난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자 박주영(35)씨와 지난해 동아일보 문학담당 권기태 기자가 함께 수상한 것이다.

수상작 두 권 중 한 권이 먼저 출간됐다. 박주영씨의 '백수생활백서'(민음사)다. 변변한 직업도 없이 책만 읽어대는 28세 미혼여성의 이야기다. 말하자면 소설은, 하루 한 권 이상의 책을 비타민처럼 복용하고 쇼핑몰 카트를 끌고 서점의 책들을 쓸어 담는 것이 꿈인 한 여성의 책 편력기다. 딱히 서사랄 것도 없다. 그럴 듯한 사건도 없이 소설은 책 얘기만 잔뜩 늘어놓는다. 주인공의 심드렁한 일상보다는 다른 책에서 인용한 구절들이 더 인상적이었다는 점에서, 소설은 작가 자신의 독서일기이거나 원고지 800장 분량의 '작가의 말'로도 읽힌다.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있다. 제목이 너무 유행을 탔다. 요즘 유행이라는 '백수 소설'들과 달리, 소설은 청년 백수의 지지리 궁상을 열거하지 않는다(백서라니! 표지도 노란 색인데). 청년 백수 양산 시대를 사는 청춘들의 남루한 일상에 소설은 관심이 없다. 되레 소설은 독자와 작가의 관계, 읽는 행위와 쓰는 행위의 경계를 묻고 또 묻는다. 증거도 있다. 소설의 원래 제목은 '탐험과 소유'였다. 탐험이 작가의 몫이라면 소유는 독자의 권리인가를 묻고 싶었다고 작가는 말했다. 애초 의도부터 달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소설은 매력적이다. 주인공 서연의 캐릭터 때문이다. 이토록 오만하고 이기적인, 그래서 대책 없는 캐릭터가 우리 문학사에 또 있었던가. 서연에겐 고민.반성.갈등 같은 게 없다. 욕심이 없으니 불행도 없다. 가끔 심심할 때는 있다. 그러면 책을 펴면 된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부류의 사람이지만, 상관없다. … 나는 아주 조용히 이 초라한 도시 한 모퉁이에서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음을 즐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추락의 공포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일상이다. 나는 희망이 없다. 아니, 있긴 있으나 단순하다. 그러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 나는 잃을 것이 거의 없다. 나는 가볍고 의미 없고 비생산적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가 마음에 든다.'

소설은 백서(White Paper)라기 보단 선언(Manifesto)이다. 참고 견뎌야 가질 수 있는 인생 따위는 아예 거부하는 21세기 신(新)인간의 탄생을 선언한 것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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