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축출당한 조자양|13년전 등신세 비슷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자오쯔양」(조자양) 총서기의 실각은 당적만 남긴채 모든 당직에서 축출됐다는 점에서 76년 주자파로 몰려 일체의 당직에서 쫓겨났던 「뎡샤오핑」(등소평) 의 두번째 실각과 흡사하다.
또 학생들의 민주화시위에 대한 채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점에서 고「후야오방」(호요방) 전총서기의 실각과 궤를 갈이 한다. 그러나 호가 당시 정치국상무위원직을 보유한 채 총서기직에서만 축출됐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76년4월 당부주석의 자리까지 올라 「마으쩌둥」(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되던 등은 「주언라이」(주은내) 추모사태로 발단된 천안문광장 반혁명폭동으로 부주석·제1부수상·총참모장등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문화대혁명에 이어 두번째로 실각한다.
당시 당중앙위원회는 『반혁명폭동이 등에 의해 잘 계획되고 조직된것으로 「적대적 모순」』이라고 발표함으로써 「적대적모순」은 모가 등을 오류를 범한 동지로서가 아니라 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 조의 실각에는 이면에 등의 실각과 같이 권력투쟁적 성격이 강하게 깔려있다.
등은 76년 당시 우파인 주자파를 대표하고 있었으며 등을 밀어낸 것은 극좌친모파였다.
등은 당시 계급투쟁에 반대하고 경제개혁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극좌급진파는 이러한 움직임이 중국을 자본주의화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공격을 가했었다.
조는 87년 총서기 취임후 생산력발전을 우선으로하는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주장하면서 경제활성화의 새바람을 일으켰으나 「리펑」(이붕) 수상등 개혁신중파의 견제를 받으면서 개혁추진으로 인한 인플레등에 대한 문제점으로 집중공격을 받았다.
등은 조의 개혁정책을 지원하면서 한편으로는「천윈」(진운) 중앙고문위원회주임등 보수파원로들과 이붕·「야오이린」(요의림)등 계획경제파가 반조노선을 형성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번에 호요방때와 같은 형식으로 조를 제거했다.
호축출 당시에는「후치리」(호계립), 「차오스」(교석),「우쉐첸」(오학겸) 등을 주축으로 하는 호요방파와 진운·「펑전」(창진)등을 주축으로 하는 보수파와의 싸움이였는데 등은 결국 보수파를 택하면서 호계립·교석등을 당직에 그대로 두면서 경제개혁의 지속성을 유지, 정치는「좌」 경제는「우」를 표방했다.
이번 조의 축출에서도 『경제발전에 미친 공로를 인정』함으로써 경제개혁의 계속성을 암시했다.
실각의 원인과 결과를 비슷하게 경험한 세 사람중 등은 완전히 권력자로 복귀했고, 호의 경우 병사함으로써 등과 같은 화려한 재등장은 못했지만 장례식이 당의 공식적인 추모를 받은데 비해 앞으로 조의 미래가 어떻게 나타날지 주목거리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