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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상 발언 논란, 하루키의 충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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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도쿄총국장

서승욱 도쿄총국장

▶히라사와 가쓰에이(平泥勝榮) 자민당 의원=“만난 적도 없으면서 제멋대로 만났다고, 부탁받았다고 하고 있는 거 아니냐. 천황폐하(일왕)는 100% 이런 말을 하셨을 리가 없다. 궁내청도 ‘면담한 적이 없다’고 확인했다는데, 이런 망언을 방치하면 마치 사실인 양 퍼진다.”

▶고노 다로(河野太郞)외상=“(일왕이) 문희상 의장과 면회한 기록은 없다. (문) 의장의 일련의 발언은 너무나 부적절하다.”

25일 오전 일본 중의원 예산위에서 자민당 의원과 외상 사이에 오간 대화다.

도마에 오른 건 문희상 국회의장이 최근 미국에서 했다는 연합뉴스 인터뷰다. “전쟁 주범의 아들인 일왕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블룸버그 인터뷰가 논란이 됐던 문 의장은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또 일왕을 언급했다. “10년 전에 일왕이 한국에 오고 싶다며 나에게 다리를 놓아달라고 했을 때, 다른 것을 할 것 없이 무조건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있는 곳에 가서 ‘미안합니다’ 한마디만 하면 된다고 했다”는 내용이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경찰 간부 출신 자민당 8선 의원 히라사와는 “문 의장이 10년 전 천황 폐하를 만났는지가 핵심”이라며 “빨리 조치를 취하라”며 정부를 닦달했다. 물론 정치인 발언의 진위는 중요하다. 만약 없는 얘기를 지어냈다면 발언 전체의 진정성이 의심받을 수 있다. 그래서 문 의장도 적당한 기회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게 옳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역사문제를 대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태도다. 문 의장이나 한국인들이 바라는 건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진짜 미안해하는 마음, 그런 마음에 걸맞은 태도와 행동이다. “천황폐하가 문 의장을 만났느냐”보다, 위안부·징용 문제로 더 크게 갈라진 양국 간 감정의 골을 어떻게 메울지에 집중해야 할 때다. 하지만 일본 정치인들은 “제발 달을 봐달라”는 요청은 외면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끝에만 매일 화를 내고 있다.

중의원에서 이처럼 견딜 수 없을 만큼의 대화가 오가기 직전,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독자들과의 대화’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일본에서도 역사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다. 자기 나라에 좋은 것만 역사로 남기려는 건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이런 움직임에 저항하고 이를 부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른 역사를 전하는 게 우리 세대의 임무다.” 창피함을 아는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면 하루키의 말에 쥐구멍부터 찾는 게 순서일 것이다.

서승욱 도쿄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