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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로 이어진 비폭력 투쟁, 뿌리는 의병장이 쓴 『관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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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4호 14면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⑤ 소프트파워 전략

지난해 3·1운동 99주년을 맞아 부산 시민과 학생들이 동래고등학교에서 동래시장 사이의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모습. [뉴스1]

지난해 3·1운동 99주년을 맞아 부산 시민과 학생들이 동래고등학교에서 동래시장 사이의 거리를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모습. [뉴스1]

3·1운동이 의미가 있고 또 성공적이었던 요인은 비폭력 정치투쟁이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100주년을 맞도록 기이하게 보이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비폭력 투쟁이 가능했던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3·1운동에 앞선 비폭력 투쟁의 전범이 있었는지 등의 문제가 잘 해명이 안 되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곤 하는 점이다. 그런 가운데 무장투쟁이 최고이고 비폭력 정치투쟁은 좀 저급한 방식인 것처럼 은근히 폄하되기도 한다.

황태연 교수 3·1운동 성공 요인 고증 #고종·순종 밀지 받은 의병장 임병찬 #무력으로 왜군과 싸우면 백전백패 #투서와 전화 ‘이문제무’ 전략 제시 #전국 조직의 거사 계획 무산됐지만 #6년 후 만백성 한날한시에 ‘용동’

이런 시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보니 3·1운동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는 많이 나오지 않는 형편이다. 3·1운동 선양사업도 마찬가지다. 3·1운동의 발상지인 서울 탑골공원이 빈곤한 노인들의 ‘슬럼가’처럼 방치되고 있는 게 100주년을 맞는 3·1운동의 현주소다. 3·1운동을 바라보는 우리의 이중적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무장투쟁과 비폭력 정치투쟁, 둘 중 어느 것이 더 높게 평가받아야 할까. 이 문제를 많이 고민해 본 황태연 교수는 “둘 다 목숨 걸고 하는 일이기에 모두 중요하지만 1919년 3·1운동 당시 역사를 바꾸는 데는 무력투쟁보다 비폭력 정치투쟁이 더 중요했다”고 평가했다.

동국대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는 그는 지난 3년 동안 한국근대사 저서 6권을 출간했다. 『갑오왜란과 아관망명』 『백성의 나라 대한제국』 『갑진왜란과 국민전쟁』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등을 잇달아 펴내며 한국근대사 연구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에서 3·1운동의 성공 요인인 비폭력 정치투쟁의 배경과 고종의 독살 과정 등을 상세하게 고증했다.

비폭력 투쟁이라 세계 여론의 호응 받아

“3·1운동 이전까지 의병투쟁을 통해 너무 많은 희생이 있었다. 여력이 없었고 젊은이들이 성장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또 무력투쟁을 하면 피바다가 될 것이었다. 비폭력의 소프트파워 투쟁으로 전환한 이유다. 국제적인 여론으로 보아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무렵에 무력투쟁은 주목 받기 힘들었다. 비폭력 투쟁이었기에 세계 여론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열기가 상해 임시정부를 만들 정도로 강했다.”

이 같은 비폭력의 소프트파워 전략을 결정한 것은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였다.

“손병희의 행태를 놓고 시비를 걸 수도 있는데 그런 시비는 손병희 자체를 모르는 것이다. 손병희는 1894년 동학 2차 봉기 때 스스로 총을 들고 싸우다가 피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인물이다. 3·1운동의 지도자로서 그는 동학 봉기 때의 그 피바다를 다시 펼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역사적 결단을 내릴 위치에 있었다. 그는 힘을 보존하면서 투쟁하는 방식을 택했고, 더 결정적 시기가 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역사의 현장에 있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조심스러움이 그에겐 있었다. 오늘날 그런 현장에 없던 관찰자들이 쏟아내는 무분별한 발언을 가려서 봐야 한다. 태화관을 기생집이라고 어처구니없게 비하하거나 왜 안 싸우려고 했느냐는 등 시비를 거는 시각은 문제가 있다. 북한에서는 무장투쟁론만 강조하면서 3·1운동을 비하하는 데, 남한이 그런 북한의 역사관에 영향을 받아선 곤란하다.”

3·1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전 국민의 비폭력 정치투쟁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1913년 임병찬 의병장이 대한독립의군부 전략서로 쓴 『관견』이 3·1운동에 앞서 비폭력 정치투쟁의 전범을 보인 저술로 평가받는다. [중앙포토]

3·1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전 국민의 비폭력 정치투쟁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1913년 임병찬 의병장이 대한독립의군부 전략서로 쓴 『관견』이 3·1운동에 앞서 비폭력 정치투쟁의 전범을 보인 저술로 평가받는다. [중앙포토]

3·1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3·1운동의 가장 큰 특징인 비폭력 정치투쟁의 전범이 된 것은 무엇일까. 황태연이 주목한 것은 둔헌(遯軒·‘돈헌’으로도 읽음) 임병찬(1851~1916)이 쓴  『관견(管見)』이다. 임병찬은 고종과 순종 두 황제로부터 모두 거의밀지를 받은 유일한 의병장이었다. 최익현 의병장의 제자로 최익현과 함께 대마도에 유배되기도 했었다. 고종과 순종의 밀명을 받고 1912년 임병찬이 조직한 전국적 비밀 독립운동단체가 ‘대한독립의군부’이다. 대한독립의군부의 ‘비폭력 정치투쟁’ 전략서가 『관견』이었다.

1913년 11월에 작성된 『관견』은 일종의 팸플릿처럼 만들어져 전국에 배포돼 읽혔다고 한다. “임병찬은 3·1운동과 해외 독립투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관견』을 써서 고종태황제에게 상주해 재가를 받았다. 비교적 정확하게 당시 정세를 파악했고, 우리의 역량과 일본의 전력을 비교하고 나서 ‘이문승무(以文勝武)’ 또는 ‘이문제무(以文制武)’의 비폭력 정치투쟁을 승리의 전략으로 제시했다. 즉 문력(文力)이 비록 유약할지라도 무력(武力)의 강하고 굳음을 누를 수 있다는 책략이다.”

『관견』에 나타난 임병찬의 문제의식은 이런 것이다. ‘지금 왜군들은 백전(百戰)의 병졸과 지정(至精)의 무기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연무(鍊武)하지 않은 병졸만을 가지고 촌철도 없으니, 만약 지금 싸움의 승부를 내야 한다면 관중과 제갈량이 다시 살아와도 백전백패할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적을 눌러 이길(制勝) 것인가?’ 부드러움이 굳음을 누를 수 있고, 약함이 강함을 누를 수 있다는 방책은 이런 판단 아래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관견』에 나타난 구체적인 투쟁 전술은 어떤 것일까. 부드러운 소프트파워 투쟁은 구체적으로 ‘투서와 전화’인데, 중요한 것은 한날한시에 전국 360여 곳에서 일제히 국권반환을 요구하는 투서를 하고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목표는 이런 선도적 비폭력 정치투쟁의 소란을 통해 ‘땔나무꾼과 꼴꾼’까지 망라한 만백성을 일거에 ‘용동(聳動)’케 하는 것이다. 대한독립의군부의 지도부들이 모여 전국 각 군(郡)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를 계산해 투서 일자를 선정했다.

동학 봉기서 살아남은 손병희가 전략 결정

황태연 교수

황태연 교수

임병찬은 대한독립의군부의 전국 조직을 완성해 각 지역의 대표까지 선정하고 고종의 비준까지 받았으나 조직의 확산 과정에서 동지 김창식이 일제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조직이 발각됐다. 임병찬은 체포된 뒤 총독과 일본 정부 총리대신과의 직접 면담을 요구하며 항쟁하다 다시 거문도로 유배되었으며 몇 차례 자결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1916년 끝내 병으로 순국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국에 배포된 『관견』의 비폭력 투쟁전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임병찬을 비롯한 많은 동지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대한독립의군부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전국적으로 이미 배포된 『관견』의 비폭력 정치투쟁 전략은 뜻있는 국민의 의식 속에 살아남았다. 한날한시에 전국에서 일제히 분출하는 방식이 6년 후 3·1운동에서 그대로 펼쳐졌다.”

‘관견’이란 말은 본래 대통 구멍으로 세상을 내다본다는 뜻으로 대개 좁은 소견을 가리키는 말이다. 임병찬의 이런 책 제목은 역설적이다. 그는 『관견』을 모두 11편으로 나눠 서술했다. 구체적으로는 ①‘논(論)천하대세’ ②‘논(論)시국형편’ ③‘지기(知己)’ ④‘지피(知彼)’ ⑤‘천시(天時)’ ⑥‘제승(制勝)’ ⑦‘정산(定算)’ ⑧(대한독립의군부 관제를 담은)‘요인(料人)’ ⑨‘요사(料事)’ ⑩‘비어(備禦)’ ⑪(운영규칙을 담은)‘부하별록(附下別錄)’ 등으로 구성돼 있다. 세부 목차에서 보이듯 비폭력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상당히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3·1운동의 성공 요인인 비폭력 투쟁의 원형을 보여준 문건으로 지목된 『관견』과 임병찬과 대한독립의군부의 활동에 대해 좀 더 넓고 깊은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오늘날 ‘촛불시위’의 비폭력 정치투쟁도 그 연원이 먼 데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일제 1880년대 ‘동양사’ 개설 … 침략 전 역사 왜곡 시동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과 일본의 학자 10명이 공동연구 형식의 기념논문집을 발간했다. 제목은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체제』(지식산업사)이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사사가와 노리카쓰 메이지대 교수가 공동 편집했다.

두 교수는 2014년 여름 양국 공동연구 세미나 팀을 구성, 모두 4차례의 공동 세미나를 열었고, 15편의 발표 논문을 모아 이번에 책으로 출간했다.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를 제기해온 아라이 신이치 전 이바라키대 명예교수의 글도 함께 실려 주목된다. ‘3·1독립만세운동의 세계사적 시각-세계사 인식, 서술과의 관련’이란 논문이다. 오늘날 우리 역사학계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은 ‘동양사’가 처음 생겨난 배경을 서술하고 있어 주목된다.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기 훨씬 이전인 1880년대 일본에서 등장하는데, 무력 정복에 앞서 역사왜곡 프로그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역사 연구·교육이 일본사·동양사·서양사 셋으로 나뉘게 된다. ‘일본사’ 분야에선 주로 천황주의 국체관념으로 일본 민족의 우월적 국가관을 개발하고, ‘동양사’ 분야에선 한국과 중국 등 타국 역사를 정체론으로 묶는 논리를 개발하며, ‘서양사’ 분야에선 일본제국의 팽창주의를 합리화하는 논리를 개발했다고 분석했다.

공동연구팀에 참가했던 아라이 교수는 2017년 말 92세로 타계해 이 글이 그의 마지막 논문 격이 됐다. 이태진 교수는 “이번 공동연구의 결론으로 삼아도 좋은 내용”이라고 평했다.

이밖에 이태진 교수의 ‘국민 탄생의 역사-3·1독립만세운동의 배경’, 사사가와 교수의 ‘일본의 헌법체제 수립과 식민지 청산에 대하여’, 김태웅 서울대 교수의 ‘3·1운동 만세시위 관립전문학생들의 내면세계’, 변영호 쓰루분카대 교수의 ‘손병희의 사상과 3·1독립만세운동’, 세리카와 데쓰요 니쇼가쿠샤대 명예교수의 ‘3·1독립운동과 일본문학의 관련 양상’, 김봉진 기타큐슈대 교수의 ‘안중근과 일본, 일본인’ 등이 실렸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balance@joongang.co.kr

※ 황태연 인터뷰 전문은 ‘월간중앙’ 3월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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