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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이 'NO'하면 장관도 힘 못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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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대통령과의 대화’에 참석한 중앙부처 실·국장급.


"국장이 그렇게 대단한 자리야?” 외환은행을 론스타가 인수할 수 있도록 승인해 달라는 공문을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구속)이 전결로 처리해 금융감독위원회에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간에 오르내린 얘기다. 과연 외환은행 매각이라는 중차대한 사안을 국장 선에서 처리할 수 있었을까. 중앙인사위원회의 한 팀장은 “윗선과 물론 조율이 있었겠지만 국장 전결도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대한민국 공무원 국장’이 어떤 자리이기에….

중앙인사위원회 관계자 얘기는 이렇다.
“국장이면 실무적인 총책임자다. 장·차관은 정무직이다. 위로 1급 실장이 있지만, 그 정도면 이제 정치할 때다. 국장이 노(NO)하면 장·차관도 추진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공무원 사회에서 사무관(5급)이 사실 핵심 업무를 담당하는데 그 조직의 실무적인 리더라면 파워를 가늠해 볼 수 있지 않나.”

그는 문제가 된 변양호 전 국장과 관련해 사견임을 전제로 “금융정책국장이면 아마 우리나라 금융분야의 최고 결정권자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본인의 판단이 곧 정책 결정일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다른 의견도 있다. 공문을 전결한 것은 변 국장일지라도 윗선에 아무 보고 없이 이뤄지기는 관료사회 생리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산자부 국장 출신인 한 기업체 인사는 “행여 장관과 적대관계인 국장이었다면 모를까 혼자 그런 결정을 하기는 어려운 자리”라고 말했다. 이 인사 역시 사견임을 강조하면서 “국장이 되면 누구나 아래보다는 위를 보게 돼 있다”며 “외환은행 매각 같은 큰 사안을 국장이 단독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현직 산자부 국장 역시 “소신껏 추진하면 장관이 웬만하면 들어준다는 점에서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윗선과 커뮤니케이션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재경부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이 합친 조직이라 수평적인 의사소통이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수직적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돼 있지는 않고, 나도 그렇게 알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의 공문은 김진표 전 재경부 장관 명의로 됐고, 이를 변 전 국장이 전결 처리해 이정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김석동 당시 금감위 감독정책1국장 앞으로 보낸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처 간에 오가는 공문이 대부분 부처장 명의로 돼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명의 자체는 중요치 않다는 시각도 있다. 항간에는 당시 외환은행 매각에 관여했던 변양호 전 국장, 백모 국장 등이 경제부총리나 금감위원장 의사결정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 같은 얘기가 나오고 있다.

국장 힘 모으면 장관 왕따도

공무원 국장이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국장을 공무원의 꽃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무원 직급체계로 보면 국장은 2~3급이다. 3급 과장도 있기는 하지만 현재 공무원 2~3급 1079명 중 직위가 국장으로 돼 있는 공무원은 673명이다. 이들은 사실상 관료사회의 핵심이다.

“국장이면 공무원의 정점이죠. 요즘에야 개방형 직위제도라고 해서 민간인들이 들어와 국장 자리에 앉는 경우도 있지만 크게 의미는 없다. 행시 출신 국장 정도 되면 대단한 파워입니다. 요즘도 간간이 벌어지는 일이지만, 장관이 새로 부임해 오면 실·국장에게 호된 신고식을 치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솔직히 부처 출신이 아닌 이상 장관이 뭘 알겠습니다. 실·국장이 다 해줘야 하는데, 고시 기수로 뭉쳐진 국장들이 장관을 왕따시키는데 어쩔 수 있겠습니까.”

교육부 서기관이 전한 이야기다. 실제로 이는 관가에서 여러 차례 화제가 된 얘기다. 또 모 부처 장관이 취임한 후 의욕에 앞서 기업형으로 조직 문화를 바꾸겠다고 했다. 그러자 실·국장들은 장관이 주재하는 회의에 아예 참석을 안 하거나, 회의 중 잡담을 하며 노골적으로 반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부처의 경우 장관과 실·국장 간 갈등이 꽤 오래갔다. 한 국장은 기자들과 저녁 자리에서 “쥐뿔도 모르는 ×이 와서 실·국장들을 대놓고 무시하는데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장관은 결국 실·국장들을 모아놓고 사과 아닌 사과를 하고 나서야 갈등이 잠잠해졌다는 후문이다.

산자부 국장을 거친 한 기업체 인사는 “현 정부 들어서 많이 변하고는 있지만 중앙부처 국장이면 부처 전결권의 절반 정도가 있었다”며 “그나마 소소한 전결이야 서기관이나 사무관급에 맡기지만 중요한 정책 결정권이 국장에게 있기 때문에 줄을 대려는 기업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이 변해서 그렇지 재경부 같은 경우 예전에는 은행장이나 재벌 기업 회장들이 사무관 면담하기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지 않았느냐”고 했다.

고위공무원단 제도에 ‘흔들’

물론 ‘국장’도 다 같지는 않다. 지방보다 중앙부처가, 중앙부처에서도 재경부나 행자부 등 소위 힘있는 부처 국장일수록 ‘체감 영향력’이 세다. 국장이 되는 길도 험난한 곳, 그렇지 않은 곳 등 제각각이다. 적체가 심한 곳에는 대우 공무원수당제도라는 것도 있다. 보직을 받지 못해 대우공무원 수당을 받는 국장급 공무원들이다. 일반적으로 행시에 합격해 국장이 되려면 20년 정도 걸린다.

현재는 행시 20~23회 출신이 국장급에 다수 포진돼 있다. 국장 재직 기간은 보통 2~3년이다. 이 기간에 1급으로 진급해 정무직(장·차관)을 바라보느냐, 관복을 벗느냐가 결정된다. 실제로 중앙인사위원회에 따르면 현직 국장급 673명 중 1년 미만 직위 유지자가 550명, 1년6개월~2년 직위 유지자는 55명에 불과하다. 치열한 생존 경쟁이 극에 달하는 때다.

여기에 행자부, 산자부, 정통부 등은 ‘실-국-과장’ 제도에서 ‘본부장-팀장’제로 바뀌면서 국장 권한이 상당 부분 팀장(과장급)으로 내려갔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행자부의 경우 전결권이 아래로 이양된 것만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행자부의 경우 팀제 전환 이후 ‘장관 2%, 차관 3%, 본부장(실·국장급) 10%, 팀장 65%’로 전결권 변화가 있었다. 예전에는 국장급이 약 35%, 장·차관이 15% 정도 전결권이 있었다. 하지만 이 제도로 오히려 실·국장급 권한이 막강해졌다는 의견도 있다.

한 부처 사무관은 “행자부는 장관이 결제하던 5억원 이상 예산집행 권한이 본부장에게 위임됐다”며 “시·도 출연 연구원 설립 허가 및 폐지의 경우도 결재권이 장관에서 본부장으로 내려왔고, 차관이 갖고 있던 500억원 이상 지방공기업채 발행 승인도 본부장으로 하게 됐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전결권은 줄었지만 핵심 권한은 오히려 늘었다는 것이다.

국장급 공무원들에게 닥친 또 하나의 변화는 고위공무원단 제도다. 이 제도는 1~3급(관리관, 이사관, 부이사관)의 직급을 없애고 이들을 ‘고위공무원단’이라는 테두리에 묶어 개인의 다면 평가를 통해 적합한 직무를 수행토록 하겠다는 제도다. 이를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제 성과를 내지 않는 1급·국장(고위공무원단)은 가차없이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국장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한직으로 물러날 경우 퇴출될 수 있다는 두려움, 부처 이동에 따라 수십 년 동안 쌓아온 부처 내 인맥이 한꺼번에 사라진다는 것 등에 대한 반발도 크다고 한다. 하지만 “1급으로 승진하기 위해 윗선에 잘 보이고, 머리를 굴려야 하는 스트레스는 덜해졌다”는 의견도 있다. 또 “1급에만 있었던 차관 발탁 기회가 2~3급도 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라는 의견을 내비친 국장들도 있다. [이코노미스트 김태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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