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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1% 또는 ‘임시 직원’…임원 셋 중 둘 ‘흙수저 출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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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0호 04면

[SPECIAL REPORT] 회사의 ‘별’들에게 물어보니

‘나도 이제 대한민국 직장인의 1%인 별이다’. 2년 전 박아무개 전무가 임원 승진 결과를 넌지시 알려주던 날 ‘나임원’ 상무의 머릿속엔 치열했던 23년간의 직장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 회사에 뼈를 묻겠노라며 한길만을 보고 달려왔다. 1000명 가깝던 입사 동기들은 그 사이 서너 명만 남았다.

고액 연봉과 기사 딸린 차 좋지만 #성과 못 내면 언제라도 짐 싸야 #칼퇴 없고 주말 출근은 월 1.8일 #야근 없으면 협력사 측과 술자리 #딸내미와 대화, 주 1시간이 고작 #스트레스에 시달려 탈모 경험도 #“요즘은 전무는 돼야 호사 누려” #문재인 정부 경제 정책에 C 평가 #한국의 큰 문제는 성장동력 부재

승진 직후에는 마냥 좋기만 했다. ‘흙수저’로 태어나 2억~3억원대 연봉이면 성공한 것 아닌가(설문 응답자 63.9%는 ‘나는 흙수저’). 집도 한 채 샀고, 대출도 다 갚았다(주택 자가비율 79.8%). 전망 좋은 ‘코너 오피스’와 회사에서 주는 중대형 차량은 편하기도 했고 폼도 났다.

그런데 오늘따라 꽃길만 같았던 임원의 자리가 가시밭길처럼 느껴진다. 맡아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어그러져서다. 김아무개 부장에게 화를 냈다. 지시하는 일마다 결과물이 변변치 않아 답답하다. 지금쯤 박아무개 과장과 내 욕을 하고 있을 게 뻔하다. 문득 그리 좁지 않은 집무실이 외딴섬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정신차려야 한다. 지금까지 그랬듯 성과를 내서 살아남아야 한다(88%는 ‘임원 승진에 중요한 건 업무 성과’). 지난 연말 나이 많은 선배들이 우수수 잘려 나갔다. 국내 기업 임원 숫자가 2014년 이후 줄어들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나도 결국은 비정규직이다. 임원 3년 차에 옷을 벗게 되면 만년 부장으로 정년을 맞는 것보다 손해보는 장사다. 힘을 내야 한다.

어느덧 퇴근 시간이다. 사실 퇴근 시간이랄 것도 없다. 어차피 ‘칼퇴’는 없다. 야근과 주말 출근은 일상이다(평균 주 2일 야근, 월 1.8일 주말 출근). 야근이 없는 날은 어김 없이 협력사 사람들과 술자리에 가야 한다(일주일 평균 음주 횟수 2.9회). 이러다 정말 탈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다(66%가 ‘승진 후 건강 악화 경험’).

문득 얼굴 보기 힘든 딸내미 생각이 난다. 카톡을 보내 안부를 묻는다. 답장은 없다(73.1%가 자녀와의 대화 주 1시간 미만). 며칠 전엔 아내가 첫째 아이 유학 얘기를 꺼냈다. 회사에서 웬만큼 내주는 교육비도 회사에 남아 있을 때의 얘기다. 그래, 둘째 녀석 대학 마칠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할 텐데….

[그래픽=이은영 기자 lee.eunyoung4@joins.com]

[그래픽=이은영 기자 lee.eunyoung4@joins.com]

COMPANY LIFE
달기 힘든 별, 달고도 힘든 별

134명 상무 승진, 100여 명 퇴진. 국내 모 대기업의 2019년 임원 인사 내용이다. 창사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 임원 자리에 올랐지만 그만큼 많은 ‘별’이 땅에 떨어지기도 했다. 임원이란 별은 달기도 어렵지만 그만한 무게를 견뎌야 하는 어려운 자리다. 한국시엑스오(CXO)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국내 기업에서 처음 임원으로 발탁된 평균 나이는 49.6세, 임원에서 물러난 평균 나이는 54.2세로 나타났다. 임원에 오르기까지 20년 넘게 걸리지만 평균 재직 기간은 5년6개월에 그친 것이다.

임원의 삶은 간단치 않다. 이코노미스트가 임원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그들은 자부심이 넘치고 업무에 헌신적이었다. 동시에 업무에 치이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임원의 일과는 대략 오전 7시30분에 시작한다. 주요 프로젝트 진행 사항을 점검하면 바로 회의다. 점심시간도 업무의 연장이다. 몇주 앞 점심 일정이 항상 잡혀 있다. 오후에도 역시 회의가 기다린다. 설문에 답한 임원의 69%가 매일 한두 번의 회의에 참석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회의 중이라 카톡 응답이 늦습니다’라고 적어놓았다.

임원들은 회사에 대해 긍정적이었고, 상사에 대한 존경과 부하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부하직원의 평가 기준은 실무적인 능력이 가장 많았다. 물론 스트레스도 많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부하직원이 일을 못할 때가 29.6%로 가장 높았고, 스스로의 한계를 느낄 때가 21.4%, 업무 문제로 책임져야 할 때 14.3%, 상사에게 질책을 받을 때가 10.2%였다.

회의 또 회의, 야근·야근·술·술·술 … 고단한 ‘★’의 일주일 

LIFE STYLE
‘워라밸’ 고픈 별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임원 79%의 하루 업무시간은 평균 9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겐 주 52시간 근무가 적용되지 않는다. 수시로 야근이 있다. 53%가 주 2회, 24%가 주 4회 이상 야근했다. 야근이 아니면 외부 관계자와 저녁이 있다. 임원의 52%가 월 6회 이상 외부 회식을 한다. 대상은 고객이나 협력사 사람 등이다. 그러다 보니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이다. 임원 중 69%가 1주에 3회 이상 음주를 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술로 달리는’ 임원도 6%다.

얼마 되지 않은 여가시간은 주로 가족과 보내거나 골프를 즐긴다. 그래도 가족 모두 모여 식사하는 경우는 일주일에 2~3회에 불과하다.

자녀와의 대화 시간도 주당 1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긴 근무시간과 잦은 음주로 임원 대부분이 승진 후 탈모나 건강 악화를 경험했다. 헬스클럽과 골프로 건강을 챙기지만 일주일 운동량은 4시간 미만이다. 절반 이상의 임원들은 연중 휴가를 6일 미만만 쓴다.

과거보다 회식 등으로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는 경우는 줄었다. 임원들은 ‘부서 단합을 위해 (회식이) 필요하다’(15%)거나 ‘필수는 아니지만 가끔은 해야 한다’(79%)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회식은 월 1회이하가 47%, 2~3회가 35%였다. 한 건설사 임원은 “요즘 직원들에게 회식도 업무의 연장선이라며 2차·3차를 끌고다닌다면 다음 날 네이버에 임원 갑질 기사가 뜰 것”이라며 “업무에 집중하고 최대한 사생활은 보장해 주는 방향으로 기업 문화가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ECONOMIC LIFE 
부동산으로 자산 불렸지만 노후 준비는 아직

몸은 힘들지만 자리에 대한 만족감은 높은 편이다. 85%가 현재에 만족한다고 답했다. 만족의 이유는 확실한 보상에서 나왔다. 전체의 79%가 임원으로 가장 좋은 점으로 집무실과 차량, 기사 제공을 꼽았다. 개인 비서가 생기고 해외 출장 때 비즈니스석을 이용할 수 있다. 골프 회원권을 제공하는 기업도 있다.

일반적으로 대기업 임원의 연봉은 부장의 1.5~2배 수준이다. 설문에 응한 임원 70%가 1억원에서 3억원이라고 자신의 연봉을 밝혔다. 삼성그룹 초임 상무의 연봉은 대략 1억5000만~2억5000만원 선이다. 3년 차 이상의 고참 상무가 되면 3억~5억원으로 훌쩍 뛴다. 여기에 초과이익분배금 같은 다양한 성과급이 더해진다. 현대차그룹은 이사대우나 이사에겐 1억6000만~2억원 정도를 주며 전무급으로 올라가면 3억원 벽을 넘을 수 있다. LG그룹은 부장에서 상무로 승진할 때 연봉을 100% 올려준다. 임원 초임은 1억2000만~1억5000만원 선이다. SK그룹은 신임 임원에게 1억5000만원 안팎의 연봉과 다양한 성과급을 제공한다. 한 대기업 임원은 “과거엔 임원이 되는 순간 기사 딸린 고급 세단과 개인 비서, 집무실이 기본으로 주어졌지만 요즘은 전무 정도는 달아야 예전 임원들이 누리던 호사를 경험할 수 있다”고 아쉬워했다.

임원들은 수입의 10~30%는 저축·투자, 10~20% 대출 상환, 20%는 교육비, 10~20% 문화생활, 10% 자기계발에 쓴다. 연봉으로 자산을 불렸다는 임원은 30%도 안 된다. 절반가량이 부동산으로 자산을 불렸다. 하지만 노후 대비를 충분히 하고 있다는 응답은 10% 미만이고, 3분의 1은 퇴직 후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POLITICAL PROPENSITY 
나는 중도다, 하지만…

임원들의 과반수인 51%는 정치 성향을 ‘중도’라고 답했다. 다만 ‘보수’(27.6%)와 ‘매우 보수’(6.1%)라는 응답이 ‘진보’(14.3%)나 ‘매우 진보’(1%)보다 많았다. 평균적으로 ‘중도보수’ 정도의 정치 성향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지지 정당을 묻는 질문에 46.4%가 ‘없다’고 답한 부분이 흥미롭다. ‘더불어민주당’이 36.1%, 자유한국당이 14.4% 순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수행에 대한 점수를 매겨 달라는 질문에는 ‘B’와 ‘C’를 고른 임원이 각각 35.4%로 동률을 이뤘다. 다만 ‘A’(7.3%)보다는 ‘D’(13.5%)와 ‘F’(8.3%)를 고른 임원이 훨씬 많아 전체적으로는 ‘잘했다’는 쪽보다 ‘보통이다’에 가까웠다. 이는 무엇보다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아쉬움에서 비롯됐다. 정부의 경제정책 만족도는 ‘보통’(36.5%), ‘불만족’(29.2%), ‘매우 불만족’(20.8%)이 만족이라고 답한 경우보다 많았다.

이처럼 평가한 이유로는 “글로벌 경쟁력 강화 관점이 없다” “청와대 참모진이 실물경제에 대해 무지하다” “(경제정책이) 너무 이론적이라 현실성이 결여됐다” 등의 답변이 나왔다. 특히 소득주도 성장 정책에 대한 반대(61.9%)가 많았다.

임원들은 할당제 등을 통한 여성 임원 확대에 대해 ‘찬성’(43.9%)이 ‘반대’(31.6%)보다 많았다. 임원들은 “남녀 구분 없이 능력 위주여야 하기 때문” “여성의 사회 참여도가 높아져야 (국가적으로) 줄어드는 노동 인력을 대체할 수 있다” “남성 위주의 사회가 변해야 한다” “다양한 관점의 사고가 (사회적으로) 필요하다” 등의 목소리를 냈다. 다만 “확대는 좋으나 할당제엔 반대한다” “유능한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우려된다”는 의견도 적잖았다.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는 ‘성장동력 부재’(44.4%)를 첫손에 꼽았다. 이어 ‘사회적 불신’(26.3%), ‘저출산·고령화’(12.1%), ‘빈부격차’(10.1%), ‘교육 시스템’(7.1%) 순이었다. 빈부격차를 가장 큰 문제로 꼽은 임원은 10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한 각종 설문조사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심각한 사회 문제의 단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개혁이 시급한 분야를 묻는 질문에는 정치(53.1%), 경제(17.3%), 노동(10.2%) 순으로 답했다. 교육(9.2%)과 언론(7.1%) 분야 개혁이 시급하다고 응답한 임원도 적지 않았다.

7~18일 진행한 이번 설문에는 총 100명의 대·중견·중소·벤처기업 임원이 응답했다. 응답자 평균 연령은 만 50.9세, 평균 임원 경력은 4.1년이다. 남성이 92%, 여성이 8%다. 기업 규모별 비중은 대기업 57%, 중견기업 20%, 중소·벤처기업 23%다.

특별취재팀=조용탁·허정연·이창균·함승민 기자

※  자세한 내용은 28일 발간되는 이코노미스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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