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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투수 혹사'는 감독의 양심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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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국회 인권위에 고교 투수 혹사에 대한 진정을 내기로 했다. 노 의원이 18일 밝힌 진정서 초안의 골자는 "학생 야구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진정이 받아들여지면 인권위가 교육부를 통해 각급 학교에 선수 보호조치를 마련하도록 권고할 수 있다.

올해 들어 유난히 고교야구에 무리한 등판이 많았다. 지난 4월 대통령배 고교야구 1회전 경기고-광주 진흥고 경기에서 진흥고 정영일은 이틀에 걸쳐 13과3분의2이닝 동안 242개의 공을 던졌다. 242개의 투구수는 프로야구 역대 한 경기 최다투구수(선동열.232개)보다 많은 기록이다. 정영일은 또 5월 청룡기 결승전에선 16회까지 마운드에 올라 혼자 222개의 공을 던졌다. 그는 청룡기대회에서 9일간 741개의 공을 던졌다. 프로야구에서 선발투수의 한계투구수는 100~120개다. 그리고 등판 간격은 5일이다. 그 숫자를 대입해 보면 정영일이 얼마나 무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정영일뿐이 아니다. 고교야구 최고 좌완으로 불리는 김광현(안산공고)도 전주고와의 청룡기 16강전에서 226개의 투구수를 기록했다. 청룡기 우승을 차지한 경남고의 이상화는 대회기간에 4게임에서 혼자 47이닝을 던졌다. 모두 눈앞에 보이는 성적에 연연해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한 케이스다.

대한야구협회가 고교 투수의 부상 방지에 대해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 아마추어의 경우 초등학교와 리틀야구는 한 경기에서 3이닝 이상 던질 수 없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고교야구의 경우는 그런 제한조치가 없다. 1984년 '한 경기에서 5이닝 이상 던질 경우 그 다음 경기에 등판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었지만 결국 성적에 민감한 학교와 학부모가 그 규정을 없애자고 주장했고, 그들의 실력행사에 협회가 2년 만에 두 손을 들었다.

프로선수들이 참가하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때도 시즌 초반이라는 점 때문에 투구 제한 규정이 있었다. 이 규정이 야구의 본질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김인식 한국대표팀 감독은 "투수 보호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받아들였다. 한창 잘나가던 때 부상 때문에 은퇴해야 했던 투수 출신이기도 한 김 감독은 "한번에 많이 던지는 것도 좋지 않지만 무리한 연투가 더 나쁘다. 부상 위험도 크고, 자신도 모르게 몸의 무리를 피해 이상한 버릇이 생긴다"고 지적한다.

투수의 무리한 등판은 지도자 양심의 문제라고 본다. 성적이냐, 선수 보호와 양성이냐의 기로에서 성적만을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 한 투수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건 그만큼 다른 투수를 키우려 하지 않았거나 키우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자신이 유능하고, 존경받는 지도자임을 보여주고 싶다면 성적을 올리기 전에 선수를 키워라. 학교 스포츠에서 지도자는 '감독'이기 이전에 '스승'아닌가.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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