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배아픔 문화' 가고 추임새 문화 부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우리는 보았다. 새벽 광장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던 젊은이들의 그 순수(純粹)한 몸짓-,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도 눈빛은 맑고 밤새껏 외쳐대도 그 목소리는 쉬지 않았다. 골이 폭죽처럼 터지던 순간 우리는 그들의 달아오른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보았다. 그것은 배고파서 울고, 매 맞아서 울고, 빼앗기고 짓밟혔던 설움으로 울던 한국인의 눈물방울이 아니었다.

우리가 새벽 광장에서 본 것은 월드컵 16강을 향한 한국 축구의 꿈만은 아니었다. 어느새 티 없이 자란 아들딸들이 신나게 응원하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한풀이의 어두운 굿판'이 끝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일찍이 돈도 권력도 아닌 일에 저렇게 열광하는 한국인들을 본 적이 있는가. 변변히 해준 것도 없는 제 나라의 이름을 저토록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는 내 아이들의 밝은 얼굴을 본 적이 있는가. 기억 속의 젊은이들이 아니다. 최루탄 속에서 쫓기던 얼굴, 가슴을 찢는 시위대의 함성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헐뜯어왔다. 그랬었다. 좁은 땅 그나마 남에게 빼앗긴 땅 쪼가리에서 농사를 짓다 보니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팠다. 한정된 땅을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하다 보니 남의 행복은 나의 불행이 되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렸을 때 달리기를 하다가도 자기가 뒤처지면 '앞에 가는 놈은 도둑놈'이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다가 어느새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니다. 본래부터 그랬던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에게는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추임새 문화'를 갖고 있었다. 소리꾼이 소리를 하면 고수와 청중은 소리 사이사이에 '좋다' '으이' '얼씨구'와 같은 추임새로 흥을 돋우었다. 그래서 판소리 문화에서는 일고수이명창(一鼓手二名唱)이라는 말이 생기고 소리꾼보다도 추임새를 하는 사람을 더 높이 사기도 했다.

추임새의 응원문화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은 난장판이 된 정치판, 시장판 때문이었다. 흥이 깨진 장단은 소음이 되고, 시켜서 하는 추임새는 저주로 바뀐다. 그렇던 것이 뜻밖에 월드컵 축구경기와 붉은 악마의 응원을 통해서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고전이 된 매슬로의 5단계 욕망설의 피라미드 구조로 보면 한국은 응원문화를 통해 생리적 욕구와 안전욕구에서 3단계의 친화적 욕구(belonging needs)로 진입하게 되었음을 시사해준다. 먹고 편하게 사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젊은이들이 찾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과 내가 하나가 되는 자기 정체성이다.

이제 응원문화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경쟁상대가 '사촌'이 아니라 보다 멀고, 보다 넓은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선수가 못 돼도 그를 응원하면 내가 곧 그 선수가 된다는 일체감의 원리를 배웠다. 응원을 뜻하는 영어의 '치어'란 말이 얼굴을 뜻하는 희랍말의 카라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듯이 내가 웃는 얼굴을 하면 남도 즐거워하고 그 기쁨 또한 옮아간다. 물질은 나눌수록 작아지지만 마음은 나눌수록 커지는 이치와도 같다.

승부가 끝난 축구 경기장은 비게 되지만 붉은 옷을 입고 횃불처럼 타오르던 젊은이들의 새벽 광장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척 늘어진 아버지의 어깨를 펴기 위하여, 어머니의 주름을 펴기 위하여, 그리고 낮아져만 가는 스승님의 목소리와 풀이 죽은 기업인들의 숙인 머리와 가망 없는 후반전 45분을 살고 있는 불행한 내 이웃들을 위하여 밤새워 뜬눈으로 응원하던 그 새벽의 광장을 향해 갈 것이다.

훼방의 문화에서 응원의 문화로 물꼬를 돌리면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투사가 아니라 소리꾼의 감동이 이끄는 사회가 오고, 역사는 과거의 부정에서 미래의 창조로 날개를 달 것이다. 고통밖에는 줄 것이 없었던 낡은 정치 리더들은 웃음과 힘을 주는 치어 리더로 바뀔 것이다. 그날처럼 새벽 광장에 모여 응원을 하던 군중은 아침 해 하나씩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편안한 잠을 자기 위해서.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