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배명복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이대로는 못 살겠다”…생활고 허덕이는 민초들의 반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 2개월

사그라드는 듯하던 프랑스 ‘노란 조끼(gilets jaunes)’ 시위의 불길이 새해 들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지난 12일 열린 아홉 번째 토요집회에는 전국에서 8만4000명(프랑스 내무부 추산)이 참가했다. 한 주 전의 5만 명보다 크게 늘어난 숫자다. 시위대 규모와 거의 맞먹는 8만 명의 경찰 병력이 주요 도시에 배치돼 철통경계에 나섰지만, 부분적인 과격시위 양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민초(民草)들의 반란 성격을 띤 노란 조끼 시위는 프랑스를 넘어 세계 각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한국에선 지난주 항공업계 하청 노동자들이 노란 조끼를 입고 시위를 벌였다. 세계 6위의 경제 대국에서 토요일마다 사람들이 모여 “더 이상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 외치는 이 초현실적 상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파업과 시위가 체질화한 프랑스의 특수한 현상인가. 갈수록 양극화가 심화하는 21세기 자본주의의 붕괴 조짐인가. 엘리트가 주도하는 기존 정치·경제 질서의 전복을 꿈꾸는 민중 포퓰리즘의 신호탄인가. 지난해 11월 17일 프랑스 전역에서 28만7000명이 들고 일어난 이래 오늘로 3개월째 접어든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 사태의 전말을 여섯 개 키워드로 정리했다.

세계 6위 경제 대국 프랑스서 #토요일마다 사람들 들고 일어나 #못 살겠다 외치는 영화 같은 현실 #경제적 양극화 갈수록 심화하며 #좌·우 갈등 넘어 상·하 갈등 양상 #엘리트 기득권층에 대한 불신 #정당·노조·언론 적대시하며 #주민투표제 등 직접 민주주의 요구 #마크롱의 대국민 토론회 승부수 #광장의 분노 잠재울 수 있을지 의문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① 마지막 지푸라기(last straw)

등짐의 하중에 눌린 낙타는 마지막에 올려놓은 지푸라기 하나 때문에 털썩 주저앉는다. 힘겹게 삶의 무게를 지탱해온 프랑스 저소득층에게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유류세 인상은 낙타의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해 디젤유와 휘발유에 부과하는 유류세를 각각 23%와 15% 인상했다. 기후변화협약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맞추기 위해서는 유류세 인상을 통한 배기가스 배출 억제가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마크롱 정부는 올해에도 당 디젤유 6.5유로센트, 휘발유 2.9유로센트 추가 인상 방침을 발표했다. 경유와 휘발유값을 당 84원과 37원 올리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가뜩이나 생활고에 허덕이는 프랑스 서민들에게는 참고 참았던 불만의 폭탄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됐다.

프랑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8000달러에 달하지만, 근로자의 월평균 가처분소득은 1700유로(219만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돈으론 대도시의 비싼 집세와 높은 물가를 감당하기 힘들다. 저소득층이나 하위 중산층은 대중교통 등 제반 생활 여건이 좋지 않은 도시 외곽이나 위성도시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프랑스 전체 근로자 3명 중 1명이 자동차로 30㎞ 이상을 달려 출근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자녀의 등·하교는 물론이고, 병원·우체국·관공서·기차역에 갈 때도 운전은 필수다. 돈 잘 버는 대도시 ‘1등 시민’들에게 기름값 인상은 ‘별일’ 아니다. 얼마든지 대중교통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대도시 외곽이나 지방 중소도시, 농촌 지역에 사는 ‘2등 시민’들 사정은 다르다. 2등 시민들은 유류세 추가 인상 소식을 자신들을 겨냥한 직격탄으로 받아들였다. 노란 조끼 시위는 1등 시민을 우대하는 엘리트 집권층에 대한 2등 시민의 반란이다.

② 현대판 ‘제르미날’

19세기 후반 프랑스 탄광 노동자들의 참상을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고발한 소설이 에밀 졸라가 쓴 『제르미날』이다. 소설은 탄광들이 하나둘 문을 닫으면서 일자리를 잃거나 잃을 위기에 처한 탄광촌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과 투쟁을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세계화와 신(新)자유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 국제경쟁력을 잃고, 공장들이 문을 닫는 프랑스의 현실은 제르미날의 21세기 확대판이라고 할 수 있다.

25%에 달하는 청년실업률은 프랑스의 암담한 현실을 대변한다. 학교를 졸업해도 번듯한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운 청년들은 최저임금(SMIC)을 받고 임시직을 전전한다. 프랑스의 최저임금은 명목상 시간당 9.88유로(1만2735원)지만, 최저임금에도 엄격히 적용되는 소득세와 사회보장분담금 등을 제하고 난 실제 임금은 7.61유로(9809원)다. 주(週) 35시간 근로 기준으로, 한 달을 일해도 손에 쥐는 돈은 1154유로(148만7000원)에 불과하다. 집세와 관리비, 통신비와 교통비를 내고 나면 혼자 먹고살기도 빠듯하다. 희망도, 미래도 없는 사람들이 노란 조끼를 입고 거리로 나섰다. 마크롱 정부는 올해부터 최저임금을 정액으로 월 100유로 인상하고, 전액 정부가 부담한다고 발표했다. 국민 세금으로 최저임금을 올려주겠다는 정부 방침에 일각에선 포퓰리즘이란 지적이 나온다. 여전히 불만인 시위대는 시위대대로 “우리는 빵부스러기가 아니라 온전한 바게트를 원한다”며 반발하고 있다

그랑제콜을 나온 프랑스의 엘리트 젊은이들은 정부 기관이나 대기업에 취업해 높은 임금을 받는다. 초임이 대개 4500유로(580만원) 이상이다. 최저임금에 시달리는 대다수 청년 근로자와 고소득 엘리트들 간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세계화의 혜택을 누리며 대도시에 사는 소수의 잘 나가는 계층과 대다수 서민, 하위 중산층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과 격차가 노란 조끼 시위의 발화점이다.

③ “마크롱은 물러나라”

마크롱의 친(親)기업 개혁 정책에 대한 서민들의 반발과 분노도 위험 수위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가 국제경쟁력을 회복하고, 일자리를 늘리려면 무엇보다 기업들의 투자와 생산을 촉진해야 한다는 게 마크롱의 소신이다. 노동법 개정을 통해 해고와 채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법인세율도 25%로 낮췄다. 부자들에게 적용하는 사회연대세(부유세) 과세 기준을 고쳐 세금 부담도 덜어줬다. 부자들의 자산 이탈을 막고 국내 투자를 촉진한다는 명분이다. 그로 인해 지난해 줄어든 세수만 32억 유로(3조8670억원)에 달한다. 이를 메우기 위해 공공서비스 축소, 유류세 인상, 서민에 대한 주택수당 인하 등 반(反)서민 정책을 펴고 있다는 게 노란 조끼 시위대의 주장이다. 마크롱을 ‘부자들의 대통령’으로 규정하고, 사퇴를 요구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마크롱은 개혁 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민과의 충분한 소통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대화와 설득을 통해 민심을 다독이기보다는 의회 다수 의석의 힘을 믿고 자기 뜻대로 독주하는 오만한 모습을 보였다. 마크롱의 권위주의적 국정운영 방식에 대한 불만도 노란 조끼 시위를 촉발한 원인 중 하나다. 마크롱의 지지율이 20% 선까지 곤두박질한 데는 이 요인이 크다.

④ 엘리트 기득권층에 대한 반감

좌·우를 떠나 정치적 기득권층에 대한 프랑스 국민의 불신이 극에 달해 있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진보와 보수 진영의 주류 정당들은 궤멸적 수준의 동반 참패를 기록했다. 그에 따른 정치적 공백을 아웃사이더인 마크롱이 중도를 내세워 고스란히 흡수했다. 노동총연맹(CGT), 프랑스민주노총(CFDT) 등 전국 단위 대형 노조에 대한 반감도 크다. 노조가 정규직 노동자들과 노조 간부들의 이익만 옹호하는 정치적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했다는 것이 노란 조끼 시위 참가자들의 시각이다. 노란 조끼들이 혐오하는 기득권층에 정당과 노조만 있는 게 아니다. 언론도 포함된다. 경제적 이해 때문에 대기업과 정부 편을 드는 언론사 기자들도 엘리트 기득권 세력의 일부라는 것이다. 시위의 폭력성을 부각한 언론 보도에 시위대는 극도의 불만을 드러내며 언론에 적대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노란 조끼 시위는 좌·우 갈등에서 상·하 갈등으로 넘어간 프랑스 사회의 새로운 단층선을 보여주고 있다. 노란 조끼들은 정당이나 노조, 시민단체 등을 배격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발적으로 결속해 들고 일어났다. 기득권층에 대한 반감과 불신이 그만큼 크고 깊다는 의미다.

⑤ 상향식 민주주의 요구

노란 조끼 시위대의 주요 요구 사항 중 하나가 ‘시민 주도 주민투표제(RIC)’ 도입이다. 대통령이 군주처럼 군림하는 프랑스의 하향식 민주주의를 스위스처럼 주민투표로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상향식 민주주의로 바꾸자는 것이다. 국민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법안의 신설·폐기·개정을 직접 청원할 수 있도록 하고, 주민투표를 통해 공직자 소환도 가능케 해야 한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마크롱은 시위대의 요구를 일부 반영해 15일부터 프랑스 전역에서 타운홀 미팅 방식의 대국민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토론은 기후변화 시대의 에너지 정책, 세제 개혁, 공공서비스 개선, 민주주의 강화 등 네 가지 큰 주제를 놓고 두 달간 진행된다. 광장의 분노를 강당의 토론으로 흡수한다는 전략이지만 기대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이 토론을 통해 다수가 수긍할 수 있는 생산적 결과가 도출된다면 노란 조끼 시위는 프랑스는 물론이고, 마크롱에게도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70% 국민의 여론이다.

⑥ 포퓰리즘의 거센 바람

대중의 즉물적 요구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이 전 세계적 현상으로 확산하고 있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은 물론이고, 브렉시트(Brexit)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영국, 동유럽의 폴란드와 헝가리, 남유럽의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서 포퓰리즘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내일보다 당장 오늘만 생각하고, 편협한 국익을 우선하는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악성 바이러스다. 노란 조끼 시위에 밀려 마크롱마저 개혁의 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프랑스 역시 포퓰리즘의 광풍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프랑스와 함께 유럽 민주주의의 양대 보루인 독일도 흔들리고 있다. 극우 정치세력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는 반면 임기 말을 앞둔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점점 힘을 잃고 있다. 마크롱의 실패는 단순히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포퓰리즘에 흔들리는 유럽의 문제이고, 위기에 처한 세계 민주주의의 문제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