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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의 어쩌다 투자]2019년 크립토 시장, 뭣이 중한디…비트코인ETF 보다 ‘백트’다?

중앙일보

입력

10일 오후 3시경. 잘 나가는가 싶던 암호화폐 시장에 삭풍이 불었다. 450만 원선 안팎을 유지하던 비트코인 가격이 갑자기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락세를 이어가더니 11일 오후 1시경엔 400만 원선마저 위협받았다.

백트가 뭐길래(상)

시장 참여들은 무슨 일이 터졌나 의아해 했다. 특별한 악재가 눈에 띄지 않아서다. 그간 가격이 올랐으니 조정을 받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갑작스런 추세 변화의 이유로는 근거가 빈약했다.

일부는 오는 24일로 예정됐던 암호화폐 트레이딩 플랫폼인 백트(Bakkt)의 비트코인 선물 상품 론칭이 연기된 것 아니냐는 설을 제기했다. 지난해 12월에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어야 하는 상품이다. 이달로 상장을 연기했는데, 또 미루는 바람에 실망 매물이 쏟아진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얼마 전 백트가 1억82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는 소식에 한껏 부풀어 올랐던 시장 기대감이 배신당해, 가격에 더 큰 충격을 줬다는 풀이다.

출처: 코인스피커

출처: 코인스피커

비트코인 선물 상품이 처음은 아니다. 2017년 말, 시카고상품거래소(CME)와 시카고옵션거래소(CBOE)에서도 비트코인 선물을 출시했다. 비트멕스(BitMex) 등 전통 암호화폐 거래소에서는 비트코인 선물 거래가 이뤄진 건 이미 수년 전이다. 후발 주자에 불과한 백트의 비트코인 선물 상장 여부가 왜 이렇게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비트코인 상품지수펀드(ETF)보다 백트의 비트코인 선물 상장이 암호화폐 시장의 더 큰 이슈라고들 말하는 건 왜일까. 도대체 백트가 뭐 길래.

비트코인 선물, 꼬리가 몸통을 흔들었다

백트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먼저, 백트가 출시하려는 비트코인 선물(The Bakkt Bitcoin (USD) Daily Futures Contract) 상품의 특징이다.

선물(futures) 거래는 미래의 일정 시점에 미리 정한 가격으로 매매할 것을 현재 시점에서 약속하는 거래다. ‘밭떼기’를 떠올려 보자. 배추 농사를 짓는 농민들 입장에선 배추 농사가 풍년일지 흉년일지, 가격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배추값이 금값이 되면야 좋겠지만 배추가 넘쳐나 똥값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날 봄에 배추씨를 뿌리자 마자 장사꾼이 와서 제안을 한다. 집앞 텃밭에서 나오는 배추 전체를 가을에 얼마에 사겠다고 한다. 그 가격이면 원가에 노임(노동력)까지 반영한 돈을 벌 수 있다. 하지만, 혹여라도 가을에 배추가 금추가 되면 장사꾼이 부르는 값에 파는 건 손해다.

농부 입장에서 주판알을 튕긴다. 배추값이 똥값이 돼 노임도 못 건지는 것보다는, 적더라도 수익을 확정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다. 장사꾼과 배추 밭떼기 계약(이 경우 정확히는 선도거래라고 하는 편이 맞다. 선물거래는 선도거래와 개념은 비슷한데, 좀 더 표준화ㆍ규격화된 거래라고 보면 된다)을 맺는다. 미래 불확실성이라는 위험을 헤지하는 거래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출처: 네이버 블로그

국내 최초의 선물거래는 일제강점기 인천 미두시장이다. 일제가 미곡(쌀)의 품질과 가격을 표준화하겠다는 명목으로 1896년 개설한 인천미두취인소(거래소)에서 쌀 거래가 중일 전쟁 때까지 40여년 간 성행했다.

선물 거래는 미래 가격 변동 위험을 헤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투기 수요를 촉발하기도 한다. 미래 거래를 약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장 거래 대금 전부를 지불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만 계약금으로 걸면 거래에 참여할 수 있다.

인천 미두시장이 그랬다. 가진 돈의 10배까지도 쌀을 살 수 있었다. 투기꾼들이 몰렸다.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으로 쌀값 변동성이 커지면서 1910년 2000만 석대였던 쌀 거래량은 1920년엔 9000만 석을 돌파했다. 쌀값을 귀신같이 알아맞혀서 ‘미두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던 반복창이라는 사내는 그해 선물거래로 30만 원(현재 가치 30억원 추정)을 벌기도 했다.

2000년대 중반 국내 주식선물 시장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강화되기 전, ‘압구정 미꾸라지’나 ‘목포 세발낚지’ 등의 전설적인 인물이 회자됐다. 다들 몇 천 만원으로 수백억원을 벌어들였다(이후 정부가 증거금 규정 등을 강화하면서 국내 주식선물 시장 규모는 급격히 위축됐다).

암호화폐 거래소인 비트멕스는 비트코인 선물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레버리지를 100배까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투기 성격의 개인 자금이 몰린다. 레버리지 100배라는 건 1만원만 있어도 100만원은 있는 것처럼 거래할 수 있다는 의미다. 비트코인 가격이 1%만 움직여도 100%의 수익을 낼 수 있다.

기관 투자자들이 비트코인 시장 참여를 꺼리는 이유는 가격 변동성은 높은데 헤지 수단은 부재하기 때문이다. 가격 변동 위험을 헤지하기 위해선 선물 시장이 발달해야 하는데, 기관들이 움직이기엔 비트멕스 같은 개인들 위주 시장은 너무 사이즈가 작다. 게다가 보안 수준은 어떤지, 가격 조작 위험은 없는지 등 거래소에 대한 신뢰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2017년 말 전통 금융시장 플레이어라 할 수 있는 CME와 CBOE가 비트코인 선물을 내놓는다고 했을 때, 시장에서는 기관 자금이 암호화폐 시장으로 유입될 수 있는 통로라고 환호했다. 뭉터기 자금이 들어오면 비트코인 가격이 어디까지 오를 수 있을지 기대감에 부풀었다.

결과는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비트코인 선물 출시와 함께 비트코인 가격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선물 상품이 나온다는 소식에 취해 간과한 게 있다. CME나 CBOE는 청산일에 계약을 현금으로 정산한다. 비트코인 실물로 하지 않는다. 곧, 비트코인 선물 시장이라고는 하지만 실물 비트코인의 수요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매수자(롱 포지션)와 매도자(숏 포지션) 간의 제로섬 시장이다. 누군가 돈을 벌면, 누군가는돈을 잃는다.

비트코인 선물 시장에 들어 온 기관 투자자들은 비트코인 가격이 너무 과열됐다는 판단에 따라 일제히 숏 포지션을 취했다. 비트코인 선물 시장에서 가격이 떨어지자, 비트코인 현물 가격이 동반 하락했다. 선물 가격이 현물 가격을 좌지우지 하는, 이른바 ‘웩더독(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시장은 본격적인 침체에 들어갔다.

크립토 버전의 NYSE 나온다

백트가 24일 상장하겠다고 한 비트코인 선물 상품은 다르다. ‘실물 인수도(Physical Delivery)’ 방식이다.  정산을 할 때 현금으로 서로 상계하는 게 아니라 실제 비트코인이 오간다. 곧, 백트의 비트코인 선물 상품을 매매하는 기관 투자자들에게는 실제 비트코인이 필요하다. 이 상품의 거래 규모가 커진다는 건, 실제 비트코인 수요가 늘어난다는 의미다.

출처: 백트

출처: 백트

게다가 계약 기간은 한 달이나 분기가 아니라 하루 단위다. 백트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상품 개요는 다음과 같다. 심볼은 ‘BTC’다. 계약은 1비트코인 단위다. 하루 가격 변동폭은 제한 없다. 일일 계약의 상장은 거래소의 영업일마다 이뤄진다. 최소 가격 변동폭은 1비트코인(계약)당 2.5달러다. ‘미국 ICE 선물(ICE Futures US)’ 시장에 오는 24일 상장될 예정이며, 청산소는 ‘미국 ICE 청산소(ICE Clear US)’다. 실물 비트코인은 ‘ICE 디지털 자산 보관소(ICE Digital Asset Warehouse)’에 보관된다.

백트 측은 지난해 8월 비트코인 선물 출시와 관련해 “가격 조작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리적으로 비트코인을 보유하는 것”이라며 “백트가 출시하는 비트코인 선물은 마진거래나 레버리지 거래 등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고 밝혔다.

곧, 백트의 비트코인 선물 상품은 말이 선물이지 사실상 현물을 거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거래되는 비트코인과의 차이라면, 전통 금융의 바운더리 안에서 비트코인을 거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백트는 규제당국의 감독을 받고, 전통 거래소와 같은 매커니즘의 수탁 방식을 사용한다. 곧, 백트의 비트코인 선물을 거래하는 것은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주식을 거래하는 정도의 법의 보호를 받는다. 거래소를 믿을 수 없어 진입을 꺼렸던 기관들에게 문을 활짝 여는 셈이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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