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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최저임금 결정돼도 문제있으면 재심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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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최저임금위원회가 결정한 최저임금에 대해 정부가 재심의 권한을 보강,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1988년 최저임금제도가 시행된 이후 이의제기에 따른 재심의가 이뤄진 적은 한 번도 없다. 사실상 유명무실한 이 제도를 보완해 최저임금의 정책적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1988년 이후 사문화된 권한 #정부, 책임 강화 위해 활용 검토 #최저임금 결정 구조도 이원화 #구간설정위서 한 번, 결정위 한 번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7일 최저임금 결정구조 개편 초안을 발표했다. 전문가로 구성된 구간설정위원회에서 인상 범위를 정하면 결정위원회가 최종 결정하는 형식으로 이원화한다. 공익위원 선정은 노사 추천과 상호배제, 국회 추천 형식으로 바꾼다. 고용부 장관이 행사했던 공익위원 단독 추천권을 내려놓음으로써 정부는 완전히 빠지는 셈이 된다. 정부가 역할도, 책임도 없는 모호한 위치에 선다는 뜻이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저임금은 여느 시장 임금과 달리 국가가 정해서 강제한다”며 “이를 감안하면 정부가 방관자적 상황에 놓이는 것은 국가 경제 운용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고려하는 것이 재심의 강화 방안이다. 고용부 고위 관계자는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재심의 권한을 활성화하도록 정책적으로 보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한국경영자총협회, 소상공인연합회 등은 “2018년에 적용되는 최저임금 인상률(10.9%)이 너무 과하다”며 재심의를 요청했다. 그러나 고용부는 “절차상 하자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급격한 인상률의 적정성을 놓고 정부에서조차 ‘속도조절론’이 나오는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선진국에선 최저임금을 결정할 때 정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국에선 9인의 전문가가 노사 의견과 시장 상황 등을 폭넓게 분석해 잠정 결정하면 최종 결정을 정부가 한다. 노사의 의견 대립이 있어도 전문가가 거르고, 최종 결정을 정부가 함으로써 정부의 책임성을 강화한 형태다. 프랑스나 네덜란드도 노사의 의견을 종합해 정부가 정한다. 최저임금위에서 정하는 나라도 노사가 합의에 실패하면 국회나 정부가 결정하는 등 정부의 역할이 크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서 다양한 경제 주체의 의견을 담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재심의 권한을 활성화하는 것은 여러 경제 주체의 의견을 반영하고, 경제 운용의 정책적 기능과 책임성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공익위원 선정 방식을 ‘노사 추천→노사 상호배제+국회 추천’으로 바꾼 것은 공익위원의 편향성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다. 이 장관은 중앙일보와의 신년 인터뷰(1월 3일자 1, 10면)에서 “공익위원의 공정성과 객관성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구간설정위원회는 전문가로 구성된다. 인상 범위를 정할 때는 경제·고용 상황, 사회보장 급여 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최저임금 결정 이원화 파장 … “노사 대립 심해질 우려”

지금까지는 생계비나 소득분배율 등만 봤다.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다는 지적이 나온 이유다.

결정위원회는 지금처럼 노사와 공익위원으로 구성된다. 다만 구간설정위원회가 신설되기 때문에 위원 수는 15~21명으로 축소된다. 현재는 각 9명씩 27명이다. 위원에는 청년과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 중소 중견기업과 소상공인 대표가 반드시 참여하도록 바뀐다.

정부가 결정 체계를 변경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덜 주고 더 받으려는 노사 교섭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극심한 갈등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2016년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서 나타난 노사 갈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노동계는 79.2% 인상을 요구했다. 경영계는 동결을 주장했다. 격차가 워낙 커서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됐다. 지금까지 32차례의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서 노사와 공익위원 합의로 이뤄진 경우는 7회에 불과했다. 표결로 결정한 25회 중에서도 노사가 모두 참여한 건 8회뿐이었다. 어느 한쪽은 퇴장했다.

경영계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경총은 2007년부터 정부가 직접 최저임금을 결정하거나 최저임금 결정 구조를 공익위원이 안을 제시하고, 그 안에서 결정하는 방식으로 개선할 것을 주장해 왔다. 하상우 경총 경제조사본부장은 “공익위원의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진일보했다”면서도 “강화돼야 할 정부의 책임과 역할이 안 보여 이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동계는 반발했다. “전문가가 인상 구간을 미리 정하는 것은 노사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한국노총)이라는 입장이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9일 최저임금위 근로자위원 워크숍을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학계에서는 제도 개선을 하는 데 대해서는 긍정적이지만 논란거리도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무송 한국산업기술대 석좌교수는 “전문가의 역할 강화를 염두에 뒀다면 차라리 영국식 정공법이 낫다”며 “위원회와 공익위원 수만 늘어나면 결정 과정이 오히려 복잡해지고 노사 대립이 심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익위원을 노사 추천과 상호배제 형식으로 꾸리면 소신있는 전문가는 배제되고, 무색무취한 학자로 꾸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노사 눈치보기가 심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공익위원 국회 추천제도 자칫하면 정치화의 소용돌이에 말려들 위험이 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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