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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안면도 핵처리시설’에 성난 민심…정부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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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1990년 3월 19일 12대 과학기술처 장관을 맡은 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과학기술은 국제적 성격이 강해 국제협력 행사가 수없이 열렸고 외빈 방문도 줄을 이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의장 임무도 수행하면서 내가 제안한 세계 과학장관회의를 빈에서 열기도 했다. 과학기술은 장기계획이 필수적이므로 그동안 개별적으로 구상했던 정책들을 정리해 90년대 과학기술 종합개발 정책을 세우려고 했다. 70년대 한국형 미사일을 개발한 이경서 박사의 힌트대로 ‘장기적인 국가 발전을 목표로 하는 기술경제를 위한 과학’을 강조하며 관련 정책 개발에 나섰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618) #<71> 7개월 만에 과기처장관 하차 #안면도 사용후 핵연료 시설 논의 #원자력연구소와 충청남도 양측이 #주무부처 과기처도 모르게 진행 #90년 11월 대규모 반대 시위 발생 #장관실 찾은 대표들에게 설명해도 #사태 악화일로…도의적 책임 사임

1990년 11월 안면도 주민들이방사성 폐기물 중간저장시설 설치안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중앙포토]

1990년 11월 안면도 주민들이방사성 폐기물 중간저장시설 설치안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중앙포토]

그런 와중에 그해 10월 말 IAEA 총회를 마치고 귀국해 당시 건설이 한창이던 대덕 과학연구단지를 찾았는데 과기처 산하인 원자력연구소의 소장이 급히 나를 찾았다. 소장은 안면도에 건설할 원자력연구소의 ‘사용후핵연료 처리 연구시설’에 대해 보고했다. 장관직 인수 때도 듣지 못한 내용이었다. 원자력연구소가 주무부처인 과기처의 이상희 전임 장관과도 충분한 논의 없이 충청남도와 협의해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일주일 뒤에 터졌다. ‘안면도에 핵 처리 시설이 들어온다’는 기사가 보도되자 지역 주민이 반발해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정부는 크게 당황했다. 몇몇 주민 대표와 지역 정치인들은 장관실에 찾아왔다. 나는 그들에게 현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방사성 물질을 안전하게 취급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며, 정부가 이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려면 여러 단계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가자 주민 대표들의 얼굴에서는 불안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진실한 대화를 하면 풀리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들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변했다. 한 주민 대표는 “장관께서는 꼭 학교 선생님 같아요.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주민 대표단은 내게 들은 설명을 다른 주민들에게 전달하겠다고 약속하며 떠났다. 하지만 이들은 시위대에 의해 격리됐고 사태는 더욱 격렬해졌다.

1990년 11월 안면도 방사성 폐기물 중간저장시설 설치안 반대 시위 현장의 모습.[중앙포토]

1990년 11월 안면도 방사성 폐기물 중간저장시설 설치안 반대 시위 현장의 모습.[중앙포토]

나는 11월 8일 강영훈 총리를 만나 사의를 표명했다.
“원자력 주무장관으로서 도의적 책임을 지겠습니다.”
“정 장관 취임 전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까? 책임질 일이 아닙니다.”
“주무장관이 모르는 사업인 건 맞지만, 국민은 책임지는 정부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이튿날 강 총리가 전화를 걸어와 청와대에서 내가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뜻을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취임 7개월 20일밖에 되지 않은 장관을 물러나게 한 이유는 청와대가 우선 시위부터 진정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성난 군중을 무마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던 셈이다.

1990년 11월 안면도 방사성 폐기물 중간저장 시설 설치안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진압에 나선 경찰을 향해 한 주민이 항의하고 있다.[중앙포토]

1990년 11월 안면도 방사성 폐기물 중간저장 시설 설치안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진압에 나선 경찰을 향해 한 주민이 항의하고 있다.[중앙포토]

나는 다시 아주대 석좌교수로 돌아가 고등기술연구원 설립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잠시 정부에 갔던 교수가 돌아오니 동료 교수나 대학원 학생들은 대환영이었다. 역시 나의 천직은 교수임을 느낄 수 있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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