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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보균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문재인의 ‘대한민국 100년’ 원조는 이승만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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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이승만과 김구의 역사적 화해

2019년은 기억의 해다. 올해는 3·1 독립운동 100주년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수립 100돌이다. 100년의 이미지는 아득하고 장구하다. 그 역사의 평가와 시각은 여러 갈래다. 문재인 정부의 접근 자세는 풍랑을 예고한다.

‘3·1 운동, 임정 100년’의 진실 #1919년 건국론은 이승만 작품 #민국 30년이 ‘100년’ 연호 뿌리 #김구는 ‘임정=건국’ 아니고 #건국을 미래 과제로 여겨 #‘48년 건국론’은 보수 음모라는 #좌파 주장 허물어져 #이승만·김구의 역사적 제휴로 #‘거목들의 갈등’ 프레임 깨야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는 공세적이다. “한국 사회의 주류 세력 구조를 3·1정신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겠다”(한완상 공동위원장). 근·현대사 논쟁은 거칠고 다양하다. 좌우, 보수·진보, 이념과 정체성, 지도력과 인물로 나뉘고 얽혀 있다. 갈등의 풍경에 우남(雩南) 이승만과 백범(白凡) 김구도 있다.

‘대한민국 100년’은 임시정부를 기린다. 그 속에 건국 시점 논란이 있다. 나라가 언제 세워졌느냐다. ‘1919년 임정 수립’ 때냐, ‘1948년 정부 수립’이냐다. 논쟁은 잠복과 점화를 반복한다.

이승만과 김구의 현대사 진실

이승만과 김구의 현대사 진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다. 해방 3년 후다. 그것은 이승만의 집념의 산물이다. 보수 우파는 그때를 건국 기점으로 삼는다. 백범은 그 상황을 거부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불참 이유다. 그것으로 우남과 백범 사이는 대립으로 마감한다.

좌파·진보 쪽은 이승만을 깎아내린다. 그들은 대항 카드로 김구의 삶을 내세운다. 그 연장선에서 ‘48년’의 의미를 축소한다. 좌파의 통념은 ‘1919년 임정 건국론’이다. 임정의 상징은 김구 선생이다. 문 대통령의 시각도 비슷하다. 그의 지난해 3·1절 경축사는 단정적이다. “새로운 국민주권의 역사가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향해 다시 써지기 시작했다.” 건국 100주년은 김구를 기리는 깃발이다.

깃발은 역사의 진실과 어울리는가. 김구는 ‘1919년 건국론’의 주창자인가. 그 해답은 충격이다. 김구의 인식은 제한적이다. 그는 임정을 건국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임정은 건국의 과정이다(건국강령). 그렇다면 누구인가. 이승만이 그것의 주창자다. 그것은 상식을 깨는 놀라움이다. 그 진실은 다수 좌파·진보 정치인·학자의 역사적 무지를 고발한다. 도진순(창원대 사학과) 교수는 그 주제의 학문적 성취를 이룩했다. 그는 백범 연구의 대가다. 그는 “이승만이야말로 1919년 건국론의 창시자”라고 했다. 상하이 통합 임정의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다.

해방 공간(1945~48년)은 이념과 인물의 경연장이었다. 김구의 언어는 임정 법통(法統)과 건국대업이다. 임정을 기반으로 앞으로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다. 1946년 2월 ‘남조선 민주의원’ 개원식이 있었다.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김구·김규식이 뽑혔다. 도진순은 김구의 말을 채집했다. 나는 옛 신문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 비록 재덕이 부족하나 이 중대한 시국에 돌아보아 스스로 안일을 貪(탐)할 수 없음으로 성심성의 全(전)역량을 기울여 毁譽褒貶(훼예포폄)을 不願(불원)하고 이 건국대업에 정진하려 합니다”(대동신문 46년 2월 15일자 김구 부의장 연설). 건국대업은 미래 목표다. 그는 1948년 3·1일 휘호를 썼다. ‘良心建國(양심건국)’이다.

1948년 5·10 선거가 있었다. 이어 제헌의회 발족→헌법 제정→정·부통령 선출이다. 중심 인물은 이승만(국회의장→대통령)이다. 그것으로 “국가 건설의 세 요소인 영토·국민·주권이 완료됐다”(장영수 고려대 교수·헌법학). 그 사실은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에서 확인된다. 김대중의 표현은 “대한민국 건국 50년사”(1998년)였다. 노무현은 “(58년 전 해방) 그로부터 3년 후에는 민주공화국을 세웠다”(2003년)고 했다.

승만의 의지는 그 사실을 뛰어넘었다. 그는 그것을 건국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의 어휘는 대한민국의 재건설·부활·재탄생·계승·재건이다. 그의 국회의장 연설(1948년 5월 30일)은 실감 난다. “대한독립민주정부를 재건설하려는 것이다. ··· 오늘의 대한민주국이 다시 탄생한 것과 따라서 이 국회가 우리나라에 유일한 민족 대표기관임을 세계만방에 공포합니다. ··· 민국 연호(年號)는 기미년(1919년)에서 기산(起算)할 것이다. 대한민국 30년 5월 31일”(국회 속기록).

‘1919년 임정 건국론’은 그렇게 이승만의 작품이다. 그 발언은 망각이 겹치면서 석연찮았던 의문을 풀어준다. ‘48년 건국론’이 이승만 추종 친일파의 음모라는 주장도 무너진다. 도진순은 이렇게 분석한다. “1919년 건국론은 김구의 참여 없이도 임정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이승만의 욕망과 기억 방식이다.” 그는 그러면서 “건국일과 건국절(節)은 다르다. 1948년 건국 사실과 그 건국을 어떻게 평가·기념하는가는 다른 문제”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2일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그의 글귀는 ‘대한민국 새로운 100년’이다(방명록). 100년 원전은 이승만의 ‘대한민국 30년’이다. ‘민국 연호’의 지적 소유권은 이승만에게 있다.

김구는 정부 수립에 불참했다. 하지만 그의 ‘임정법통론’은 국가의 위대한 정체성으로 존재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 뿌리를 내렸다. 헌법 전문(前文)은 그것을 뚜렷이 했다. 신복룡(전 건국대 석좌교수) 박사는 “임정 100년을 회고·기념하려면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 이승만을 배제·우회하면 뒤틀리고 옹색해진다”고 했다.

이승만·김구는 민족주의 우파였다. 둘은 임정의 최고 지도자다. 첫 지도자(초대 대통령)는 이승만. 마지막(주석)은 김구다. 둘은 ‘형님·아우님’이었다. 이승만(1875년생)이 한 살 많다.

해방정국은 험악했다. 건준(조선건국준비위)은 ‘임정 봉대(奉戴, 공경하여 떠받듦)’를 거부했다. 건준의 간판은 남북 합작. 주도자인 여운형은 이렇게 주장했다.

“임정은 스스로 자멸할 단체이며, ··· 임정보다 고생을 많이 하고 유수한 독립 단체가 많으며, 임정은 해외의 안전지대에 있었다.” 그것은 사실과 다른 모욕이다.

한은 임정을 형편없이 다룬다(조선력사). “림시정부는 부르죠아 민족운동 상층분자들의 부패타락과 매국배족….”  북한의 3·1운동 평가도 그런 맥락이다. “3·1 인민봉기는 로동계급의 령도, 당의 령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100주년 기념사업회’는 남북한 공동 행사를 모색한다. 소설가 복거일은 “공동 사업은 역사관이 다른 남북한 모두를 난처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이승만과 김구의 유산은 현대사 공간을 지배한다. 둘의 공통점은 결정적이다. 김구는 자유다. “나의 정치 이념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자유다”(『백범일지』). 이승만은 자유 예찬론자다. 문재인 정부의 교육부는 기이한 실험을 한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려 한다(교과서 집필 기준). 삭제 시도는 김구 정신에 대한 모독이다.

이승만은 공산주의를 제압·저지했다. 김구는 소련 사회주의의 악마성을 간파했다.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독재 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 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그 판단은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나온다.

임정은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소련 지도자 레닌은 독립 지원 자금을 보냈다. 지원금 착복 문제가 터졌다. “그로 인해 국무총리 이동휘는 러시아로 도주하였고··· 공금 횡령범 김립(이동휘 심복)은 두 청년에게 총살을 당하니 인심은 칭쾌(稱快, 통쾌하게 여기다)되더라.”

『백범일지(白凡逸志)』는 그 상황을 긴박하게 전개한다. 복거일의 지적은 실감 난다.  “이승만은 좌파들 탓에 탄핵을 받고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래도 김구는 이승만을 지지했다. 김구와 이승만이 연합해 임시정부를 지켰다.”

1948년 김구는 38선을 넘었다. 그의 남북 협상 시도는 최후의 불꽃이었다. 통일독립의 열망이 관성(慣性)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북한은 이미 소련 위성국가로 움직였다. 김구는 좌절했다. 좌파·진보 쪽은 김구의 평양 행적을 ‘우리 민족끼리’로 채색한다. 하지만 백범 정신 속에 불변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스탈린식 반(反)인권 체제에 대한 거부다. 김구의 시각으로는 북한의 3대 세습은 용인될 수 없다.

보 좌파들 대다수는 역사의 신전에 김구를 옹립했다. 그들은 이승만과 김구를 대립시킨다. 그것은 두 사람의 갈등 프레임이다. 그들은 김구의 생애를 반(反)이승만으로 활용한다. 김구의 비극적 죽음도 거기에 투사한다.

우파 보수진영의 대응은 대체로 정교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 프레임 속에서 김구를 비판한다. 일부의 공격은 과도하다. 그의 단정 불참을 건국 방해로 묘사한다. 그들은 김구의 고뇌를 포용하지 못했다. 그것은 역설로 작용한다. 좌파의 전략 구도를 강화해 준다.

진보 좌파의 그 프레임은 한계를 갖는다. 이승만과 김구의 단련된 공통점 때문이다. “두 위인은 모두 건국의 아버지다. 두 사람의 오랜 동행이 한국을 만들었다. 목숨을 건 항일 독립운동, 공산주의 반대, 우파 민족주의, 반탁(신탁통치 반대), 기독교다”(손세일 지음 『이승만과 김구』).

신복룡은 해방정국 인물을 추적했다. 그의 학문적 외침은 도전적이다. 김구는 통합·통일을 추구했다. “하지만 백범은 좌파일 수 없는 사람이다. 김구는 김구답게 정통 보수민족주의자로 그대로 두는 것이 그분을 위한 길이다.” 이승만과 김구를 묶어야 한다. 보수가 앞장서야 한다. 두 거목(巨木)의 역사적 화해는 절실하다. 그래야 현대사를 둘러싼 기억과 서술의 혼란과 왜곡을 정돈한다. 그것은 우파의 현대사 주도권을 제공한다.

‘대한민국 100년’은 장엄하다. 서사적 기념 조건은 역사 시각의 통합이다. ‘100년 기념사업회’는 현대사를 독점할 수 없다.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의 이종찬 위원장은 “임정 정신의 핵심은 통합”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통합 성패는 여기서 판가름난다.

박보균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