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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단 외국기업 철수 "속수무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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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값싸고 억척스러운 노동력을 노려 국내에 진출한 외국인 투자기업들이 임금인상·인간적인 대우를 요구하는 노조의 요구에 갑작스런 자본철수로 맞서는 사례가 늘어 정부의 국익차원 대처가 요구되고 있다.
이 바람에 한국TC전자·한국피코·슈어프러덕츠 등 집단실업을 당한 회사근로자들이 회사와 노총회관 등에서 「단물만 빼먹고 달아난」 이들 기업들의 횡포와 외국자본유치를 위해 각종 특혜를 베풀어주고 막상 떠날 때는 속수무책인 정부를 성토하며 혹시나 하는 기대로 농성장을 떠나지 못 하고 있다.
특히 60년대말 제정된 「외국인 투자기업에 대한 임시특례법」에 따라 토지·건물·설비시설 등을 임대받고 진출한 이들 외국인 투자기업으로선 철수하더라도 투자손실이 거의 없는 맹점마저 있어 외국기업 근로자의 기본권보장조치가 극히 미흡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실태=4월1일 현재 국내 외국인투자기업 1천5백여개사 중 60여개사가 노사분규와 관련, 자본철수를 검토하고 있으며 지난해 말부터 지금까지 3개사 2천여명의 근로자들이 집단 실업, 『위장 폐엄철회하고 일자리를 되돌려 달라』며 회사·노총·미대사관 등에서 시위·농성을 벌여왔다.
▲한국TC전자 (마산수출자유지역내)=지난 3일 폐업공고를 내고 퇴직금·해고수당을 지급하는 등 청산작업에 들어간 뒤 경영실권자들이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여성근로자 18명이 집단 상경, 11일 낮부터 여의도동 동화빌딩 8층 TC전자 서울사무소에서 한국인사장 이중구씨(62)를 5일동안 감금, 본사인 『미국 텐디그룹과의 대화창구를 열어달라』며 농성을 벌이다 19일 밤 진압경찰에 의해 전원 연행돼 영등포경찰서에 입건됐다.
이 회사는 정부의 외자유치가 한창이던 72년 미국의 텐디그룹이 전액투자한 업체로 종업원 1천4백여명, 수출실적은 마산수출자유지역내 5위권이다.
노조결성 한달만인 지난해 7월 구사대 남자직원들의 노조원 폭행사건이 뉴욕타임스 등 미국신문에 보도되어 곤경에 빠지자 회사측은 공장의 중국이전계획을 같은 신문 8월26일자에서 밝혔다.
1월부터 해고·근무시간 등 취업규칙 1백11개항을 놓고 단체협상을 벌이면서 노조측이 압력수단으로 리번달기 등 준법투쟁에 들어가자 회사측이 협상을 무기연기, 폐업풍문이 나돌면서 3월6일 조업중단, 4월3일 폐업을 결정했다.
회사측 이중구사장은 『원화절상·노사분규로 적자경영이 예상돼 폐업을 결정했다』면서『퇴직금지급 등 합법절차를 거쳤으며 자신은 3월31일자로 해임돼 실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감금농성을 주도한 노조홍보부장 김진옥씨 (26· 여) 는 『자체조사결과 설립 후 지금까지 줄곧 마산수출자유지역 80여개업체 중 최고의 흑자를 냈으며 지난해 7월 구사대 폭력사건외에는 조업중단때까지 농성 한번 없었다』고 맞섰다.
▲한국피코 (경기도부천시·전자부품생산)=일당 4천1백원에서 월14만원으로 임금을 인상해 달라는 노조와 임금협상 중인 3월2일 「제임스·오코넬」사장이 돌연 출국해 버렸다. 3백여 4O대 주부종업원들은 같은 달 22일 주한미상공회의소 등에서 사장소환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으며 폐업상태의 회사에서 45일째 농성 중이다.
▲슈어프러덕츠(서울구로공단·치과재료)=4개월째 근로자 2백4O여명이 「위장폐업철회」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이 회사는 지난해 9월부터 3개월간 노조간부들이 임금협상안을 준비하던 중 12월29일 「하워드·글렌디」 미국사장이 적자경영을 이유로 폐업을 공고했다.
회사측은 『원화절상에다 노조활동으로 생산성이 저하, 적자경영을 계속할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나 노조위원장 문순덕씨 (23) 는 『저임금에 당국의 특혜까지 받으며 16년간 막대한 흑자를 내고도 최근 노조를 중심으로 근로조건개선·임금인상바람이 불자 자본철수를 노조와해용으로 쓰고 있다』고 맞섰다.
◇대책=이같은 현상이 확산되는데도 당국의 대책부재로 구제책이 마련되지 않자 TC전자·피코·슈어프러덕츠·US마그네틱스 등 저임금을 노려 진출했던 외국인투자기업 중 실업위기에 직면한 7개사 노조는 지난해 12월 「외국기업 부당철수저지 및 노조탄압 분쇄투쟁위원회」(위원장 유점순·한국피코노조위원장)를 결성, 「외국기업 부당철수분쇄 및 노조탄압저지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5월 중 공청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한국노총 이성균사무차장도 『외국인투자기업문제는 「특별대책반」을 노총차원에서 구성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며 『저임금에 의존해 왔던 이들 업체들이 타산이 맞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임대했던 시설 일체를 반납하고 문을 닫아버려 국가간 감정이 겹친 큰 문제가 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14일 이와 관련 박종근 노총위원장이 미대사관을 항의차 방문했으나 대사관측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TC전자의 경우 법적 하자가 없다』는 입장만 밝힌 상태다.
당국으로서도 외국자본유치에 따른 정책을 재검토, 이들 외국인투자기업이 철수할 때 경영권을 국내책임자 등에게 넘겨 집단실업을 막게 하는 방안이나 기업잉여금의 일부를 적립케 해 실업근로자들에게 돌려주는 방안 등 적극적인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기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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