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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팔계 같은 ‘돼지 인간’ 보며 웃고 행복해졌으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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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6호 24면

한상윤 작가가 지난 24일 오후 개인전이 열린 JY 아트 갤러리에서 장난스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한상윤 작가가 지난 24일 오후 개인전이 열린 JY 아트 갤러리에서 장난스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인섭 기자]

다섯 살 때부터 한의사 할아버지 밑에서 붓글씨를 쓰고 화선지에 먹으로 그림을 그렸다.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 1기로 입학해 전국에서 모인 재주꾼들과 겨루며 만화적 감수성을 더했다. 고3 때 일본으로 훌쩍 유학을 떠나 최고의 만화학과가 있는 대학에서 석사까지 마쳤다. 작가 한상윤(33)의 이력이다.

돼지 그리는 작가 한상윤 #한국화의 담백함까지 더해 #현대인 물질에 대한 욕망 풍자 #돼지를 수묵으로 표현하는 #한국적 팝아트 선보이고 싶어

그는 돼지를 그린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돼지의 얼굴을 한 인간이다.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꼭 10년째다. 그는 왜 돼지에 천착하는 것일까. 2019년 기해년 ‘황금돼지해’를 앞두고 국내 전시를 막 마친 그를 만났다.

유학을 고등학생 때 떠났다.
“당시 황선길 교장 선생님의 권유 덕분이다. 원래 미국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국보다 일본이 나을 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고 3때 사이타마에 있는 호소다 고교에 들어갔고 이어 교토에 있는 세이카(精華)대학 카툰만화과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은 어땠나.
“캐리커처와 만평 등 풍자 만화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죽어라 공부한 덕분에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에 대한 풍자화가 일본 TV에 소개된 적도 있다.”
돼지는 어떻게 그리게 됐나.
“동물 만화가로 유명한 요시토미 야스오(吉富康夫) 교수님은 지도 방식이 엄격해 정말 무서웠다. 시간이 날 때마다 교토 동물원에 가서 동물 스케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여러 동물을 그리다가 돼지에 집중하게 됐다.”
이유가 뭔가.
“흔히 돼지 보고 더럽고 욕심 많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면서 돼지고기는 맛있게 먹고 돼지꿈을 꾸면 좋아한다. 사실 누구나 그런 양면성, 이중성이 있지 않나. 명품 브랜드 차림의 돼지 인간을 통해 현대인의 물질에 대한 욕망을 풍자하고 싶었다. 게다가 개인적인 사연도 있다.”
그게 뭔가.
“키가 183cm인데 대학 1학년 때 몸무게가 135kg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내가 돈을 벌어가며 공부를 해야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루에 8개까지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뚱뚱하니 일자리를 얻기도 더 힘들었다.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삼시세끼를 익힌 토마토만 먹고, 웬만한 곳은 다 걸어다녔다. 그렇게 1년을 하니 60kg이 빠지더라.”

그는 2009년 귀국해 동국대 한국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한국에서 그리고 싶었다. 한지와 캔버스에 석채를 이용해 돼지 인간을 그렸다. 덕분에 그의 그림은 단순한 풍자 만화를 넘어서는, 팝아트적 경쾌함과 한국화의 담백함까지 녹아있다.

한 작가의 돼지그림 시리즈 중 ‘나이스샷’(2017). [신인섭 기자]

한 작가의 돼지그림 시리즈 중 ‘나이스샷’(2017). [신인섭 기자]

유화 물감이 아니라 석채를 쓴다.
“돌가루는 천연의 느낌을 준다. 반짝반짝하고 은은하다. 한지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 한지에는 세심하고 끈질긴 우리나라의 정신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돼지 인간의 표정이 밝아진 듯하다.
“길상사 덕현 스님께서 내 그림을 보시더니 ‘삼장법사 따라간 손오공보다 인간의 모순 담은 저팔계의 모든 것이 표현되어 있구나’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풍자와 해학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니 그닥 재미있지 않았다. 내가 그리고 싶은 나의 마음을 그려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고, 웃는 모습을 더 많이 그리게 됐다. 사탕도 아작아작 씹어먹는 것과 살살 녹여 먹는 것이 다르지 않나.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내 그림을 보고 많이 웃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나.
“우리 근현대사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다. 화려하고 재미있는 모습뿐 아니라 역사 의식을 담아내고 싶다. 지난여름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우리 이민 1세대들의 고단한 역사를 알게 됐다. 그것을 사탕수수를 든 한국인 돼지와 하와이언 레이(꽃목걸이)를 건 원주민 돼지로 그렸더니 너무들 좋아하시더라. 돼지를 수묵으로 표현하는 한국적 팝아트를 선보이고 싶다.”
애니메이션은 안 만드나.
“사실 구상은 해놨다. 기업인·정치인·시민이라는 세 마리 돼지가 주인공이다. 컴퓨터 작업이 아닌, 손으로 그리는 2D애니메이션으로 만들거다. 요즘 디지털이 대세라고 다들 말하지만, 결국 아날로그로 돌아온다. 엽서를 그려 방송국에 보내고, 서점에서 신간을 처음 넘겨볼 때의 두근거림을 요즘 학생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내년 돼지해가 돼지 그림을 그린 지 10주년이 되는데.
“10주년 기념전을 일본에서 크게 할 생각이다. 마침 아르바이트를 하던 호텔의 바 사장님을 통해 MK택시 그룹과 인연이 닿아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게 됐다. 김영모과자점에서 내 작품을 이용한 제품이 나오고, 중앙대에서 객원 교수로도 일하게 돼 더욱 바쁜 한 해가 될 것 같다.”

정형모 전문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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