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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사찰 나의 사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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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18일 기자들에게 보낸 대법원 판례다. 자신들의 활동은 ‘민간인 사찰의 개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다. “공무원이 법령에 규정된 직무 범위를 벗어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평소의 동향을 감시·파악할 목적으로 지속적으로 개인의 집회·결사에 관한 활동이나 사생활에 관한 정보를 미행·망원(網員)·활용·탐문채집 등의 방법으로 비밀리에 수집·관리하는 것이다.”

1998년 7월 24일 판결이었다. 어라, 98년? 국가정보기관에 의한 무차별 도청이 판치던 때 아니던가. 현 정권이 자신들의 유전자 우월성을 반증할 사례로 꼽곤 하는 21세기적 사건(이명박 정권에서의 민간인 사찰)을 두고 굳이 20세기의 예를 든단 말인가. 의아했다. 이명박 청와대에 있던 인사에게 물었다. “사찰이라고 시끄러웠지만 강요·주거침입 정도만 유죄로 인정됐다. 물어보는 수준의 정보 수집은 범죄가 될 순 없는 것이다. 이 정부는 그게 사찰인 양, 범죄인 양 선전했던 것이다.” 정치 언어로서의 사찰과 범죄의 사찰 사이에 큰 간격이 있다는 얘기겠다.

석동현 변호사가 떠올랐다. 현 청와대가 ‘불법 사찰’(범죄란 의미다)의 주역으로 본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변호인이다. 그에게 “청와대가 98년의 대법원 판례를 언급했다”고 했더니 “그게 이 전 사령관의 방어 근거이기도 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대규모 군이 투입된 현장이라 기무사 요원들이 들어갔고, 보고 중에 민간인 내용이 포함된 건 극히 일부(청와대식 용어론 ‘불순물’)였고 미행·망원·활용·탐문채집의 방법을 쓰진 않았다는 것이다.

기이했다. 청와대와 이 전 사령관의 변호인이 방어 논리로 동일한 판례를 댔기 때문이다. 이로써 묘한 역설의 순환고리가 만들어졌다. 청와대의 주장대로 김태우 검찰 수사관의 활동이 사찰이 아니라면 이 전 사령관과 그 부하들의 활동도 사찰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의 주장대로 기무사가 불법 사찰을 했다면 김 수사관과 그의 상급자들도 불법 사찰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청와대가 진정 말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한 여당 의원은 “청와대가 6급 주사(김 수사관)와 싸우고 있으니 미칠 노릇”이라고 했다. 청와대의 말이 왜 꼬였는지 짐작한다. 국정 운영엔 본질적으로 회색지대가 있게 마련이다. 암호화폐가 문제가 될 수 있으니 누군가 탐문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때론 경계선을 오가기도 한다. 현 세력은 집권해서도 마치 그런 게 없는 양 반대 세력을 몰아붙였다. 과거의 역습이다.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