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 부활스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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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때 성원을 보내주신 팬들 덕분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정말 그 분들의 사랑을 느꼈어요. 포기하지 않게 해준 원동력이 됐지요."

박세리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12일(한국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하브 드 그레이스의 불록 골프장에서 끝난 맥도날드 L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다. 박세리는 카리 웹(호주)과 연장전 끝에 우승을 차지한 뒤 "1998년 US오픈 우승도 좋았지만 이번 대회 우승이 더욱 값지고 가슴 벅차다"고 털어 놓았다. 다음은 JNA(진뉴스 에이전시) 최민석 기자가 현지에서 보내온 박세리와의 생생 인터뷰.

'요술공주' 세리가 돌아왔다. 1998년 외환 위기 당시 LPGA(미국여자프로골프) 투어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양말을 벗고 물속에서 샷을 하는 투혼을 발휘하며 우승, 온 국민의 어깨를 펴게 해줬던 박세리(CJ) 선수다.

12일(한국시간) 미국 메릴랜드주 불록 골프장에서 열린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에서 박세리 선수는 합계 8언더파로 카리 웹(호주)과 동타를 이룬 뒤 연장 첫 번째 홀에서 버디를 잡아내 역전 우승했다. 2년1개월 만에 안아보는 우승컵이었다.

오랜 슬럼프를 벗어나 화려하게 재기한 박세리의 목소리는 떨렸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눈가에는 이슬까지 맺혔다.

박선수의 슬럼프는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7월. 박세리는 프랑스 에비앙에서 스위스 로잔으로 건너가는 뱃전에서 외로움을 토로했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골프 클럽을 놓고 어디 가서 한 달쯤 푹 쉬다 왔으면 좋겠어요. 남자 친구도 만나고, 취미생활도 하고 싶지만…. 아니, 저는 시간이 있어도 노는 방법을 몰라요."

에비앙 마스터즈 3라운드에서 OB(아웃 오브 바운스)를 2개나 내면서 81타를 친 뒤였다.

'골프 여왕'으로 불렸던 박세리는 밑바닥을 경험했다. 2001년부터 3년 연속 상금 랭킹 2위에 올랐었지만 2004년엔 11위(68만 달러)로 추락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지난해엔 겨우내 입에 단내가 나도록 훈련했지만 시즌 초반부터 성적은 바닥을 헤맸다. 4월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공동 27위를 거둔 것이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지난해 12경기 34라운드에서 언더파 스코어를 기록한 것은 고작 8차례. 반면 80대 타수를 세 번이나 쳤다.

교과서나 다름없던 스윙은 사라졌고, 샷을 할 때 마다 오른쪽, 왼쪽으로 들쭉날쭉했다. 드라이브샷이 무너지니까 정교하던 아이언샷도 함께 망가졌다. 퍼트마저 고장나 3퍼트를 하기 다반사였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지난해 7월 브리티시 여자오픈에서는 러프에서 샷을 하다 손가락을 다쳐 시즌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주변의 평가는 냉담했다. "박세리는 이제 주말골퍼 수준이다. 박세리의 시대는 갔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이때가 가장 힘들었어요. 퉁퉁 부은 손가락을 보여줘도 믿지 않았으니까요."

박세리는 일단 고향인 대전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골프만을 위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며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그리고는 지난해 11월 미국 플로리다로 날아가 다시 클럽을 들었다. 톰 크리비 코치의 지도 아래 스윙도, 클럽도 모두 바꿨다. 겨우내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15시간을 훈련에 매달렸다. 무엇보다도 백스윙의 궤도를 일정하게 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태권도와 무에타이도 배웠다. 자신감을 되찾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었다.

올해 초 처음으로 발표된 여자프로골프 세계랭킹은 박세리의 승부 욕을 자극했다. 2003년까지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과 함께 '넘버 1'을 다투던 그의 세계랭킹은 90위였다. 90위라니….

박세리는 4월 진 클럽스 앤드 리조트 오픈에서 공동 9위에 오르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는 마침내 메이저대회인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맥도널드 대회는 98년에 그가 LPGA투어에서 첫 우승을 했던 대회다.

"그동안 골프가 싫었어요. 내가 왜 골프를 하는지 알 수 없었거든요. 그러나 나는 다시 일어섰어요. 이제 다시 골프를 즐길 수 있게 됐어요. 당연히 98년 우승보다 이번 우승이 더욱 값지죠."

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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