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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라는 ‘마음의 감옥’ 열어젖힌 아들, 그 앞엔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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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3호 25면

석영중의 맵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② ‘열린 문’

구소련 및 러시아 화가 일리야 글라주노프가 그린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일러스트.

구소련 및 러시아 화가 일리야 글라주노프가 그린 드미트리 카라마조프의 일러스트.

‘카라마조프가의 장남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다. 동기·정황·물증·심증 모든 면에서 드미트리는 완벽한 범인이다. 과연 그가 진짜 살인범인 것일까?

하인 “문 열렸고 아들이 범인” #선입견 탓 사실과 다르게 진술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건 유죄’ #잘못 뉘우친 아들 갱생의 길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소설은 그가 마지막 장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오판에 기여한 요인 중의 하나가 늙은 하인 그리고리가 보았다고 증언한 ‘열린 문’이다.

운명의 그날 밤, 드미트리는 그루센카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매다가 혹시나 싶어 아버지 집에 달려가 담장을 뛰어넘었다. 창밖에 숨어서 스메르자코프가 가르쳐준 암호 노크를 하자 아버지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그루센카, 너냐?”하고 음탕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 모습이 치가 떨리도록 혐오스러워서 하마터면 가지고 있던 절굿공이로 아버지를 ‘내리칠 뻔’ 했다. 대경실색한 표도르가 비명을 질러대자 드미트리는 그대로 달아났다.

지나친 정의감에 “아버지 죽인 아들” 낙인

그런데 이때 행랑채에서 자고 있던 하인 그리고리가 주인의 비명소리에 놀라 정원으로 뛰어나왔다. 주인 방 창문은 활짝 열려 있고 담을 넘어 도망가고 있는 괴한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큰아들이 주인을 죽이고 도망가는 중이라고 단정하여 “아비 죽인 놈 잡아라”라고 소리치며 괴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드미트리는 부지불식간에 절굿공이로 그리고리를 때렸고 그리고리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드미트리는 노인이 죽었다고 생각했고, 죄책감 때문에 삶에 대한 의욕을 완전히 상실했다. 마지막으로 그루센카나 한 번 보고 자살하려고 그녀를 찾아 인근 집시마을로 마차를 달렸다.

드미트리가 살인범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에는 현관문이 대단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표도르의 집 현관문은 열려져 있었고 거액의 현금이 없어졌다. 만일 그리고리가 정원에서 드미트리를 붙잡은 그 시점에서 문이 닫혀 있었다면 드미트리는 범인이 아니며, 제3의 범인이 그리고리가 의식을 잃은 후 문을 열고 들어가 표도르를 죽이고 돈을 강탈했다는 뜻이다. 만일 그리고리가 정원으로 나왔을 때 문이 이미 열려져 있었다면 범인은 드미트리 이외의 다른 사람은 될 수가 없다.

그리고리는 잠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 이 사건의 중요한 목격자로 증인석에 선다. 그는 “태연하고 당당하게” 등장하여 문이 열려져 있었다고 증언한다.

드미트리는 범인이 아니다. 그가 아버지 집을 떠날 때까지 현관문은 닫혀있었다. 그러면 그리고리는 왜 끝까지 문이 열려있었다고 고집을 부린 것일까?

무엇보다도 선입견 때문이다.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피고의 유죄는 “너무나 명백하고 결정적인 사실”로 보였다. 여기에 완고함이 더해졌다.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신앙인이라 믿는 노인은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평생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아들은 나쁜 놈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 아버지를 죽였다. 그러므로 문은 열려 있었다.’

정의에 대한 과도한 열의도 한몫했다. ‘망나니 아들은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 아들을 처벌하려면 문은 반드시 열려 있어야 한다.’ 심판을 향한 열망 때문에 그리고리는 눈이 멀었고, 그의 맹목은 정의 실현과는 반대 방향으로 사태를 몰아간다. 존속 살해범의 낙인이 찍힌 드미트리가 시베리아 유형 길에 오르는 것으로 소설은 막을 내린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의 모든 ‘아들들’은 각기 다른 운명 속에서 ‘다시 태어남’의 순간과 마주한다. 어떤 아들은 실제로 다시 태어나고 또 어떤 아들은 실패한다. 드미트리는 형편없는 건달이긴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완전히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절실한 욕구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소설에서 그토록 자주 언급되는 ‘3천 루블’은 새 인생에 필요한 비용이다. 언젠가 ‘슬쩍한’ 약혼녀 카테리나의 돈 3천 루블을 갚아야 그루센카와 새 출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테리나에게 돈을 갚지 않으면 나는 소매치기 악당이 된다. 절대로 새로운 삶을 악당으로 시작할 수는 없다.” 그는 그루센카와 함께 “모든 악과 손을 끊고 착한 일만 하며 살아가겠다고 불타는 정념 속에서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드미트리는 실제로 갱생하지만 3천 루블이 아닌 끔찍한 불행 ‘덕분에’(!) 그렇게 된다. 그를 체포하러 들이닥친 경찰이 그리고리가 살아있다는 얘기를 하는 순간, 그는 자포자기의 심연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여러분은 단 한 순간 만에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해 주셨고 부활시키셨습니다!” 자살 직전까지 갔던 그는 기쁨과 감동으로 오열하며 신을 찬미한다. “오오, 감사합니다.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를 다시 세상에 보내셨나이다!”

이 순간 이후 드미트리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 고독 속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증오가 얼마나 커다란 악인지 깨닫게 된다. 자신이 아버지의 살인에 대해서 무죄이지만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것에 대해서는 유죄임을 인정한다. 자신에게는 아버지를 향해 살의를 품을 권리가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나는 나쁜 놈입니다. 아버지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권리조차 없는 놈이지요.”

드미트리의 갱생과 관련된 문의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사실과 진실의 영역을 넘나들며 한 청년의 운명을 갈라놓는다. 모든 사람들이 ‘팩트’라고 믿는 ‘열린 문’은 ‘거짓’이다. 하지만 사실과 허위의 대립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에서 ‘열린 문’은 인간의 갱생에 대한 상징이 된다. 이 차원에서는 ‘인간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이 ‘진실’이 된다. 드미트리에게 갱생이란 결국 ‘마음의 감옥’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것이다. “나는 지난 두 달 동안 내 안에서 새로운 인간을 느꼈어. 나는 내적으로 갇혀 있었는데, 이런 날벼락만 없었더라면 결코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거야.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가야 해. 그걸 받아들이겠어!”

도스토옙스키에게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중적이며 영원히 완결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의 내면은 선과 악 사이에서 찢겨져 있다. “가슴이 뜨겁고 지혜가 뛰어난 인간도 마돈나의 이상에서 출발하여 소돔의 이상으로 끝을 맺고” “소돔의 이상을 가진 인간도 마음속에서는 마돈나의 이상을 부정하지 않는다.”이중성은 고통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표시이기도 하다. 소돔과 마돈나 사이에서, 선과 악의 기로에서, 갱생과 파멸의 기로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게 인간이다.

누구나 삶의 고비마다 ‘닫힌 문’ 열어야

드미트리의 갱생은 감동적이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치러야 하는 대가가 너무 혹독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 때문에 시베리아에서 20년형을 살아야 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지나치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아직 완결된 게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의 속편을 구상하고 있었다. 속편에서 드미트리는 유형지로 갈 것인가 탈출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선택할 예정이었다.

한 번 태어난 걸로 인생이 완결되는 게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다시 태어난다. ‘다시 태어남’ 또한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인생의 고비마다 ‘열린 문’이 존재한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모든 소설이 인간 갱생에 관한 스토리인 이유다.

석영중 고려대 노문과 교수
고려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을 수여받았으며, 제40회 백상번역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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