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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프랑스식 선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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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8일 저녁 프랑스 파리 서쪽의 베르사유궁에선 한.불 수교 1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공연과 리셉션이 열렸다. 프랑스 각계 주요 인사와 재불 한인 등 양국 관계자 700여 명이 참석해 친선과 우의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한명숙 국무총리와 티에리 브르통 프랑스 재무장관이 참석한 이 행사는 참석자 규모나 면면으로 봐서 올 한 해 동안 계속되는 100여 건 행사 가운데 단연 백미였다.

특히 프랑스는 이 행사를 국보급 건축물인 베르사유궁에서 열어 참석자들을 흐뭇하게 했다. 금박의 프랑스 왕가 문장이 달린 궁전 정문 안 '왕의 정원'에 주차를 허용하는 파격도 연출했다. '코리아 판타지' 공연이 펼쳐진 '오페라 루아얄'과 리셉션이 열린 '전쟁의 방'을 외빈 행사 장소로 제공한 것도 이례적이다. 참석한 재불 한인들은 물론 프랑스인조차 이런 유서 깊은 곳에서 공연과 파티가 함께 열리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날 엘리제궁에서 한 총리의 예방을 받은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한 시간 동안 환담을 하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융숭한 대접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간 최대 외교 현안인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는 여전히 뒷전으로 밀려난 느낌이다. 프랑스는 양국 수교 20년 전인 병인양요(1866년) 때 강화도를 침략해 왕실 도서관에 해당하는 외규장각에서 조선의 보물을 빼앗아간 뒤 지금까지 140년 동안 돌려주지 않고 있다.

한 총리도 8일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과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에게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다시 한번 요구했다. 그러나 프랑스 측은 늘 그래왔듯이 이날도 확실한 대답을 회피하고 대신 선심 쓰듯 도서의 디지털화와 한국 내 전시만 제안했다.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는 당사국 간의 지속적인 성의와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프랑스도 그런 과정을 거쳐 제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약탈한 문화재를 돌려받지 않았는가.

국보급 파티장소 제공이나 약탈 도서의 일시 전시는 문화재 약탈이라는 본질을 희석하려는 프랑스의 노회한 외교술일 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프랑스가 빼앗아간 우리 문화재를 되돌려 받는 일임을 더 강하게, 더 끈기 있게 주장해야 할 것이다.

박경덕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