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수호”내건 극약처방|“발포불사" 정부의 강수 배경과 전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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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노태우 대통령이 좌익폭력혁명세력을 다스리기 위한 「극약」처방전을 내놓았다. 공공시설을 습격·방화하는 자는 발포하고 좌경세력의 거점에 대해서는 성역을 두지 않고 공권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극약이란 백약이 무효일 때 기사회생을 위해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사용하는 최후의 선택이듯 이번 조치가 약화될대로 약화된 공권력의 권위를 회복하고 좌경세력에 철퇴를 가하는 결정적 전기가 될지, 아니면 정권과 법치가 오히려 치명타를 받아 더 큰 위기를 조성하는 계기가 될지 속단키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이번 조치는 노대통령의 시국인식이 체제수호에 위기를 느낄정도로 심각하다는 것과 그에 대처하기 위해 스스로 강력한 의지를 표시했다는 점을 일단 부각시키고 있다.
노대통령은 좌익세력의 학원·노동계·출판문화계·종교계·재야에 대한 침투가 심각할 정도로 확산되어 더이상 방치하다간 체제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인식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노대통령은 이들 좌익·폭력세력들이 민주화 추세에 편승, 반정부·반미구호를 외치며 교묘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계급폭력혁명을 기도하고 있다는 단정을 내리고 그런 문제인식과 처방을 다수 국민이 공감해 주리란 전제하에 강경대처를 결심한 것 같다.
이런 논리는 노대통령이 중간평가의 연기이유로 제시한 『좌경세력의 확산·발호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것과 맥을 같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대통령이 밝힌대로 좌경·폭력세력의 문제가 우려할만하다는 데는 다수 국민이 인식을 같이할지라도 그렇게된 배경과 원인규명에는 노대통령의 설명에 견해를 달리할 수 있는 소지가 있을 것 같다.
좌경세력이 이토록 활보하게된 데는 그들의 극렬한 투쟁과 조직확대 노력 못지 않게 그 동안 민주화란 이름아래 수수방관해온 대통령과 당국의 무책임·무능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믿는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같은 시각은 범여권, 또는 보수·우익세력일수록 더 강한 편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노대통령의 조치에 일단은 긍정을 표하면서도 이미 풀어질대로 풀어진 나사를 갑자기 죄는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불과 1, 2년 사이에 우리사회의 치안부재상태가 급격히 확산된 것은 인내를 앞세운 노대통령의 통치 스타일, 정부내 기강해이, 공직자 사회의무사안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관계자들은 역대 정권에서 힘과 비난을 동시에 누려온 안기부·경찰 등 공안조직이 6공에 와서는 진공상대가 돼버렸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있다. 힘이 뒷받침 안되고 권력이 보호해주지 않는 상태에서 자칫 책임만 따를 악역을 누가 하겠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때문에 학원소요나 노사분규·불법시위에 대처하는 이들의 자세도 소극적·형식적이었다.
특히 안기부·경찰 등 대공조직이 마비되다보니 좌경폭력세력의 파괴활동과 체제전복기도는 일사불란한데 비해 그것을 추적, 다스리는 공권력은 소걸음인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미 회복이 어려운 지경이라는 것이 정부관계자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래서 이들은 중간평가에 정면승부를 걸어 좌경의 실태를 국민에게 보이고 우익의 단합을 통해 체제수호의 전기를 마련하자는 주장을 했었다.
이런 과정이 생략된 지금 정부의 이번 강공 조치가 실효를 거두려면 우선 야당 등 정치권과 언론·국민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고 공안조직 자체가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그들의 행위에 대한 자신감으로 뭉쳐져야 한다.
한마디로 이제 좌경세력에 대해 「겁주는」단계는 지났으며 칼을 뺐으면 위엄은 지켜야 한다. 발포하고 가차없이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해놓고 또 어물어물 하거나 아니면 무차별행사를 해 지나치다는 빈축을사면 더 큰 위기가 올 것이 뻔하다.
때문에 이번 처방이 너무 갑자기 단위를 높이지 않았느냐,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면 지켜지기 어려운 측면이 많지 않느냐, 자칫 신용을 잃으면 다른데까지 원칙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있다.
우선 만약 정부가 야당당사에 경찰력을 투입해 농성자를 끌어내고 노사현장에 뛰어들어 주동자를 색출했을 때 야당이 가만있겠느냐는 점이며 그때 정부·여당이 몸을 던져 결연히 맞설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여야 정치지도자간에 이해가 맞아떨어져 중간평가는 일단 연기시켰지만 시국관·정국운영방식에 있어 여야간 견해차가 크게 좁혀졌다는 증거는 아직 없으며 중간평가 연기 후 여권의 갈등과 균열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조짐이다.
또 화염병투척과 습격이 있을 때 어느 수준에서 어떤 방법으로 자위권을 발동할 것인지에 대한 관례와 법적 뒷받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것도 문제점의 하나다.
더욱이 치안본부장이 일선경찰서·파출소에 지급하겠다고 밝힌 M-16은 방어용 이라기 보다는 살상용 무기다.
만약 이 같은 허점이 보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포가 되어 죽고 다치는 상황이 이곳저곳에서 발생했을 때 국민여론이 어떻게 돌아갈지도 깊은 고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결국 공권력 사용자의 정당성확보, 무기사용에 대한 공감대조성이 선결되지 않으면 비번 조치의 실효성확보는 한계에 부닥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노대통령과 정부는 좌경척결에 대한 강력한 의지표시 이상으로 이번 조치가 실효를 거두게 하려면 야당의 협조와 여권의 단합,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데 비상한 정치력을 발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 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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