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노무현 심리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에릭 에릭슨이란 심리학자가 있었다. 정신분석학의 아버지인 프로이트의 맥을 잇는 자다. 프로이드의 딸 아나 프로이트의 제자다. 고졸 출신으로 하버드대 교수를 했다. 근대 심리학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가 체험적 실험을 했다.

정체성 연구였다. 백인 학교에 다니는 인디언 청소년이 대상이었다. 백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짜 인디언도 아닌 그들이었다. 학교에선 백인처럼, 집에선 인디언처럼 살아야 했다. 안 그러면 심한 꾸중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다. 이중적 갈등이었다. 특히 사냥 전사(戰士.hunter)문화군(群)의 인디언 부락 애들이 더 그랬다. 가장 인디언다운 애들이었기 때문이다. 알코올 중독자는 유독 그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다.

에릭슨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정체성을 지키라 했다. 아니면 이후 닥치는 심리적 위기를 견뎌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는 얘기였다.'하얀 인디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진짜 인디언'이 되라는 주문이었다. 그래야 백인문화도 수용 가능하단 논리였다. 에릭슨은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고 '진짜 인디언'이 된 역사 속 인물을 예시했다. 간디와 히틀러였다.

노무현 대통령. 어찌 보면 그도 인디언 부락의 소년과 같다. 그에게 청와대는 백인 학교처럼 느껴질지 모른다. 살아온 배경과 직면한 현실이 다르다. 그도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을 법하다. 그의 언행을 보면 그렇다.

에릭슨의 이론대로라면 처방은 간단하다. 정체성을 유지하는 길밖에 없다. 방황은 곧 실패다. 실제로 그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것이 성공의 길이라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盧대통령은 인디언 소년이 결코 아니다. 청와대도 백인 학교일 수 없다. 전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인디언과 백인은 적대관계였다. 적과의 동화 속에 정체성은 필수적 요소다. 간디도 마찬가지다. 그에겐 적이 있었다. 정체성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적(敵)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가상의 적을 스스로 만들었다. 간디와 히틀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다른 이유다.

盧대통령에게 적은 없다. 때문에 적을 만들어선 안 된다. 그가 생각하는 적이 있다면 정체성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盧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정체성이 아니다. 그보다는 신뢰다. 신뢰는 에릭슨의 자아발달 이론 중 가장 원초적 심리발달 단계다. 서너 단계를 거친 뒤 필요한 게 정체성이다. 신뢰는 아이가 어머니를 믿는 것과 같다고 에릭슨은 말한다.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워도 아이는 울지 않는다. 곧 올 거라는 신뢰 때문이라고 에릭슨은 지적했다. 대통령이 국민을 믿는 것도 같은 이치다. 잠시 등을 돌린다해서 버리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 국민을 버리지 않는 한 말이다. 때문에 대통령은 울 필요가 없다. 그 믿음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盧대통령의 마음 속엔 불신이 자리한다. 그는 몇차례 이런 말을 했다. 야당을 향해서, 언론을 향해서였다."나를 대통령으로 대접해 준 일이 있습니까."

불신은 비판도 저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신뢰는 비판을 관심의 표시로 여긴다. 물론 盧대통령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세상 모순에 대한 울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인 노무현의 것이다. 대통령의 그것은 아니다.

불신은 불신을 부른다. 누가 먼저였는가는 나중 문제다. 누가 먼저 끊느냐가 중요하다. 정체성의 위기 속에 신뢰를 쌓는 길이 있다. 역방향의 심리발달이다. 심리학자들의 처방은 간단하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존재의 인정이 신뢰의 출발이다. 그 속에서 더 큰 가치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정체성 말이다. 그것이 건강한 대통령이 되는 길이다.

이연홍 정치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