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용호로 선수 바꿔라"…美, 까칠한 김영철이 불편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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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협상이 정체 상태인 가운데 미국이 북한에 고위급 접촉 채널 교체를 요구했다고 북ㆍ미 접촉에 정통한 정부 당국자가 28일 말했다. 이 당국자는 “지난 8일 뉴욕에서 예정됐던 북ㆍ미 고위급 접촉을 전후한 시점에 양측이 물밑 접촉을 진행했다”며 “미국은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이 아닌 이용호 외무상을 대화 파트너로 원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달 7일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 국제공항에 마중 나온 북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미 국무부]

지난달 7일 평양을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평양 국제공항에 마중 나온 북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미 국무부]

 미국이 북한 협상 대표의 교체를 요구한 것을 놓고 김영철이 군 출신(정찰총국장)이라는 점에서 경직적인 태도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이 당국자는 “김 부위원장은 남측과 협상을 한 경험이 있지만 주로 적대적이고,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했던 군사회담 전문가”라며 “이로 인해 미국과의 협상에서도 ‘갑’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비타협적으로 나오는 게 미국 입장에선 불편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자신의 회고록(『피스메이커』138페이지)에서 1990년 9월 김영철을 처음 접하면서 “군복 차림의 젊은 김영철 인민군 소장은 날카로운 눈매에 찬바람이 감도를 쌀쌀한 태도로 아무 말 없이 손만 내밀었다”고 기억했다. 이런 습성이 몸에 밴 김영철에 대해 미국 측이 반감을 가졌을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 ‘3단계 해법’으로 협상 간극 커져 #미국선 이용호 요구하며 타협점 첩첩산중

이용호 북한 외무상 [중앙포토]

이용호 북한 외무상 [중앙포토]

미국의 김영철 교체 요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직거래’를 원하고 있는 북한에 대한 견제라는 분석도 외교가에서 나온다. 최근 복수의 미 행정부 인사를 접촉했던 한국 정부 당국자는 “미 국무부 안에서도 북한에 대한 접근 방식과 관련해 의견 차이가 있는 것 같다”며 “북한 노동당의 통전부가 아닌 외무성 라인과 협상해야 한다는 트럼프 행정부 일각의 의견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진희관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회담 대표 교체를 자신들의 고유 권한으로 인식하는 북한은 미측의 요구를 주권 침해로 여길 것”이라며 “그럼에도 북한 내부에선 이번 기회에 미국과 협상을 잘 해보자는 입장도 있는 만큼 내부적인 고민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요구하는 비핵화 방식과 북한이 원하는 대가 등을 놓고 간극이 계속되며 비핵화 협상 전망도 안갯속으로 접어드는 분위기다.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내외에 공표한 것처럼 비핵화 입장은 유지하고 있다”며 “하지만 최근 비핵화 단계마다 반드시 얻어내는 일종의 명세표를 만든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종전선언 및 대북 제재 해제(추가 생산시설 폐기 등 비핵화 초기 단계)→경제(인도) 지원 및 관계 정상화(영변 핵시설 폐쇄 등 현재 및 과거 핵 폐기)→대규모 경제 지원 및 투자(핵탄두와 미사일 반출) 등으로 단계별 ‘상응 조치’를 확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북ㆍ미 정상회담(6월 12일) 전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방북할 경우 상징적으로 미사일이나 핵 물질을 내 줄 수도 있다는 입장에서 협상 조건을 더욱 강화한 것이다. 종전선언이나 제재해제를 비핵화 마지막 단계에서 논의해 볼 수 있다는 미측 입장과도 극명하게 차이 난다. 일각에선 북한이 최근 대비 협상에서 묵묵부답으로 나서는 것도 ‘우리 입장을 명확히 했으니, 미측 입장이 변화 없다면 만나봐야 의미가 없지 않냐’는 뜻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북한이나 미국 모두 시간과의 싸움에 들어간 만큼 극적으로 국면이 바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 입장에선 지난 6일 하원에서 승리한 민주당이 내년 2월 하원을 장악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크다. 그런 만큼 트럼프 대통령은 그 이전에 되돌릴 수 없는 진전이 필요하다. 북한은 2020년 당 창건 75주년을 기해 가시적인 경제 성과를 내야만 한다. 내부 자원이 사실상 고갈된 북한 입장에선 최소 내년부터 본격적인 대북 경제 지원을 받아야 한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양측 모두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한다”며 “하지만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서로 시간과 싸움을 하고 있어 현재는 꼬여만 가는 형국이지만 파란불로 바뀔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정용수 기자 nky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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