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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흔한 이혼 너무 힘든 자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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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혼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지난 한해 동안 결혼에 대한 이혼의 비율은 47.4%. 신혼부부 두쌍이 탄생하는 동안 한쌍의 부부가 이혼도장을 찍은 셈이다. 이제 이혼은 더 이상 특별한 몇몇 가정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혼에 대한 사회인식은 여전히 부정적이고, 그 안에서 겪는 이혼가정 자녀의 고통도 여전하다.

22일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공동대표 김석준 등)주최, 중앙일보 후원으로 열린 '이혼의 한국적 현황, 그리고 원인.대책'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서도 자녀양육의 문제가 이혼가정이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로 지적됐다.

이를 계기로 이혼가정 자녀가 겪고 있는 고통을 짚어본다. 이들의 생생한 증언은 이혼가정 자녀들의 인터넷카페(cafe.daum.net/ejamo) 익명 게시판에 올라온 사연을 인용했다.

결혼 대비 이혼율 47%

?"왜 나를 낳았는지"=이날 심포지엄에서 주제발표를 맡은 성신여대 채규만(심리학과)교수는 이혼가정 자녀들이 겪는 첫번째 정서적인 변화로 '분노감'을 꼽았다. 특히 한쪽 부모와 연락이 끊겼거나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느낄 경우 자녀들이 느끼는 배신감은 엄청나다.

"엄마는 언제 만나자 하고 그 날은 전화를 안 받습니다. 내일도 만나자고 약속을 했는데 역시나 거짓말이겠죠. …그만큼 제가 복수할 거예요."

한국육영회 김태련 회장은 "특히 부모가 자신을 더 이상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엄청난 혼란과 심리적 상처를 경험하게 된다"고 짚었다.

"내가 나쁜 짓을 해도 호통쳐줄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날 지켜주지 않아요.… 아빠는 왜 날 버린 걸까요."

하지만 이러한 분노와 원망 속에도 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공존한다.

"내가 이런 생활을 하는 게 모두 엄마 때문인 것 같아 자꾸 미운 마음이 들려고 해요.지금 제일 힘든 사람이 엄마란 건 알겠는데. 마음은 너무 속상하고 답답하네요."

또 함께 사는 부모에게 미안해 다른 부모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난 아무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만나고는 싶은데 또 어머니한테 미안해질까 봐…."

?"싸워도 같이 살았으면"=대부분의 자녀들은 부모가 이혼까지 결정한 심각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모르기 때문에 쉽게 과거를 미화시키기도 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부모님 이혼을 말리고 싶습니다."

부모의 이혼을 말리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일도 잦다.

"카드 빚에 채팅 중독까지 있던 엄마가 너무 싫어서 아빠의 마음을 부추겨 이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혼 후 만난 엄마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해져 있었습니다. 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 놓은 것 같다는 죄책감…."

이렇게 친부모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만큼 부모의 재혼에 대한 자녀들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아빠가 다른 아줌마랑 만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 직접 보고 말았습니다. 당황과 허무함,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성신여대 채교수는 "특히 부모가 갑자기 재혼한다고 발표하면 자녀들의 적응이 더 힘들다"고 밝혔다.

새부모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에서조차 속앓이는 계속됐다.

"새엄마가 잘해주시고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을 열게 돼 친해졌어요. 그런데 새엄마한테 갑자기 '엄마를 만나러 갈게요'라고 입이 안 떨어져요."

여전히 싸늘한 사회인식

?"친구에게 말 못해요"=부모의 이혼으로 대인관계가 위축되는 고통도 겪는다.

"나는 이혼한 집 애인데 괜히 상처받기 싫어서 그걸 숨기고 있는 겁쟁이…가족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내려 앉는다."

이렇게 갈등을 느끼면서도 이혼가정의 자녀를 색안경을 낀 채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에 용기를 내지 못한다.

"주위에는 안 알리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친구들이랑 같은 잘못을 해도 아빠 없이 자라서 그렇다고 그럴 거예요.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답니다."

이성교제나 결혼문제를 앞두고는 더욱 소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우리 부모님은 이혼하셨는데 내가 저 사람을 좋아해도 될까. 그래서 항상 나보다 부족한 사람을 원하고요. 부담없는 사람이 좋아요."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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