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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에 갇히고 내비 멈추고…불편을 넘어 삶이 사라졌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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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사는 중앙일보 조소희 기자의 체험기] 

'불편'의 영역이 아니었다. 인터넷과 전화는 내 삶을 '점령'하고 있었다. 서울 마포에 거주하는 기자의 KT통신망을 이용하는 휴대전화와 인터넷은 24일 서울 KT 아현지사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먹통이 됐다. '나가면 낫겠지' 하는 생각에 집을 나섰지만 온 동네가 마찬가지였다.

마포에 사는 기자가 겪은 서울 한복판 통신먹통 #환자 처방전 끊기고 '배달 앱' 기사는 하루 날려

24일 오전 11시쯤. 데이터가 점점 약해지더니 인터넷이 아예 불통이 됐다. ‘무슨 상황인가’ 싶어 지인에게 전화를 하려 했지만 전화와 문자마저 끊겼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옆집 사는 사람에게 미리 인사라도 해둘 걸 하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처음엔 우리 집만 이러는 줄 알았다. 노트북을 챙겨들고 인근 카페로 갔다.

오전 11시 40분. 서울시 마포구 합정 지하철역 앞에 있는 한 커피 프랜차이즈 매장. 직원 얼굴도 하얗게 질려있었다. 카드 결제가 안 되고 있었다. "잠시만요"를 반복하던 직원은 결국 "현금 있으시냐"라고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건물 전체가 KT회선을 쓰기 때문에 1층 화장품 가게나 3층의 피부관리샵도 마찬가지였다. 전산처리하는 포스(POS) 기계와 카드결제기는 모두 유·무선으로 연결돼 있다.
직원은 공책을 꺼내 쓱쓱 줄을 긋고 커피 한 잔 한 잔, 판매 잔수를 적어나갔다. ‘카카오페이 가능합니다’라는 발랄한 표지판이 오늘만큼 무의미할 수 없었다. 오던 손님들에게 "카드결제가 안 됩니다"라고 일일이 설명하던 직원은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의 한 음식점. 24일 KT 통신망이 작동하지 않으며 POS 기계와 카드결제가 모두 멈추어 손님들에게 이를 고지하고 있다. 조소희 기자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의 한 음식점. 24일 KT 통신망이 작동하지 않으며 POS 기계와 카드결제가 모두 멈추어 손님들에게 이를 고지하고 있다. 조소희 기자

낮 12시. 토요일 점심시간은 홍대 인근(마포구 서교동)의 망원동, 연남동의 자영업자에게 '가장 매출이 잘 나오는 날'이다. 불안한 사장님과 놀란 손님들이 계산대 앞에서 마주했다. 연인과 함께 망원동을 찾은 윤소현(22) 씨는 "카드결제 되나요?"를 서너군데 물어서야 결국 적당한 식당을 찾을 수 있었다.
KT가 아닌 다른 통신사를 쓰는 식당은 놀라울 정도로 안정되어 있었다.

낮 1시 45분. KT 아현지사가 화재로 인해 먹통이라며 안내하는 '긴급재난문자'는 KT 사용자에게는 1통밖에 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통신사 사용자에게는 4통이나 도착했다. 결국 재난의 상황을 알리는 문자도 통신망이 있어야 하는데, 이미 고립된 KT 사용자는 더 소외되고 있었다.

재난문자는 정작 재난을 마주한 KT 이용자에게는 오지 않았다. SKT 사용자의 휴대전화로 온 재난문자들. [독자 화면 캡쳐]

재난문자는 정작 재난을 마주한 KT 이용자에게는 오지 않았다. SKT 사용자의 휴대전화로 온 재난문자들. [독자 화면 캡쳐]

낮 2시 30분. 돈과 손만 묶인 것이 아니었다. 발이 묶인 이들도 많았다. 교통카드도 휴대폰 속에 들어가 있다. 관악구에서 지하철을 이용해 합정역으로 이동한 김유진 (30) 씨는 카드를 찍고 나올 수 없어 지하철역 안에 갇히고 말았다.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일산에서 광화문으로 향하던 성기동(32) 씨는 운전 중에 내비게이션이 멈추는 아찔한 경험을 했다.  '위치기반' 서비스도 유·무선이 멈추면 오류가 나기 일쑤다.
망원역 인근 약국에서는 인터넷이 끊기며 병원에서 발급한 처방전이 전달되지 않아 몸이 아파 병원을 찾은 환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저녁 장사를 준비하는 자영업자들도 식자재 납품업체와 통화가 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다.

오후 5시쯤, 부분적으로 통화와 문자가 복구됐다. 하지만 인터넷 사용은 여전히 힘들었다. 사람이 붐비는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에서는 여전히 통화와 문자가 불가능했다.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을 볼 수도 음악을 들을 수도 없었다.
이정도는 '불편'의 영역이었지만, 위험한 상황도 가정해볼 수 있다. 만약, 아기를 키우는 집이라면 엄마와 아빠가 서로 연락을 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며, 장애인 콜택시를 불러야만 이동할 수 있는 중증장애인들은 오늘 하루 이동을 멈춰야했을 것이다. 돈을 갚거나 빌려주기로 약속한 이들은 멈춰버린 ‘인터넷 계좌 송금’에 답답해하며 ‘인터넷이 안된다’는 황당한 변명을 늘어놓아야 했을 것이다.

오후 6시. 홍대입구역 2번출구 뒷길에는 '배달 앱'을 이용해 음식을 배달해주는 배달 기사들의 오토바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기사 안모(40)씨는 "KT를 사용하는 기사들은 오늘 하루 공쳤다. 앱으로 주문을 받아 우리가 전화해 배달가는 구조인데 인터넷이 끊기니 하루 밥벌이가 끊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녁이 돼도 '발생한 화재야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그렇지만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비상통신망이 작동하지 않으리라고는 상상해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미국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비상의 비상', '만약의 만약'의 상황에 제대로 대비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직 KT 직원은 “원래 화재나 지진 등 비상사태에 대비해 두 개의 선을 깔아놔야 했는데 하나의 선으로만 통신망을 구축했다. 그러다 보니 사고가 났을 때 복구가 힘든 것”이라고 말했다.  KT 관계자는 "혜화나 구로 같은 곳에는 국가 주요 시설이 밀집한 곳에는 두 개의 선이 깔려 있는 데, 주택이나 상점이 밀집한 마포·서대문 일대에는 하나의 선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소희 기자 jo.so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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