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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뚫은 탄환의 역사 방황 … 애국심과 민족주의 사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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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호 29면

[박보균의 현장 속으로 -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들]
종전 100년 ‘사라예보 총소리’는 어떻게 기억, 소비 됐나

가브릴로 프린치프

가브릴로 프린치프

세기의 암살자가 죽었다. 나이 24세. 1918년 4월 28일이다. 숨진 곳은 테레진(Terezin) 감옥. 그 시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땅(현재 체코)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해다. 4년간 큰 전쟁의 종료 7개월 전. 그는 ‘사라예보 총소리’의 주인공이다. 이름은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사진).

1차 대전의 방아쇠를 당긴 #프린치프의 기념판은 오랜 시련 #히틀러 역사 보복극의 노획물 #영웅, 테러범이냐 국민도 나뉘어 #지금은 저격 사실만 기록해 #유혈의 보스니아 내전 때 #순수한 애국심의 암살동기에 #편협한 민족주의 색깔 입혀

그 3년 10개월 전인 1914년 6월 28일.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를 살해했다. 거사는 제국에 대한 항거였다. 저격 장소는 사라예보(Sarajevo). 그 곳은 제국의 식민지였다. 그의 나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였다. 그곳 발칸 반도의 총소리는 뇌관이었다. 5주 후 유럽은 갈라졌다. 전쟁이 터졌다.

프린치프의 탄환은 세상을 뚫었다. 그 옛날은 송두리째 뒤집히고 무너졌다.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그때 19세 학생이었다. 그는 사형을 당하지 않았다. 그는 대역(大逆)죄로 재판정에 섰다. 제국 형법에 미성년자(20세 미만)는 사형 금지. 그의 나이는 20세에서 한 달쯤(거사일 기준) 적었다. 그는 20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것은 합스부르크 늙은 제국의 마지막 품격이었다.

사라예보 총소리의 주인공 ‘프린치프 기념석판’은 1941년4월 나치 독일의 침공과 함께 철거, 압수돼 총통 히틀러(왼쪽)의 52번째 생일 선물로 전락했다. 히틀러가 자신의 전용열차(Fuhrersonderzug)에서 독일의 역사적 모욕으로 규정한 기념판을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사라예보 총소리의 주인공 ‘프린치프 기념석판’은 1941년4월 나치 독일의 침공과 함께 철거, 압수돼 총통 히틀러(왼쪽)의 52번째 생일 선물로 전락했다. 히틀러가 자신의 전용열차(Fuhrersonderzug)에서 독일의 역사적 모욕으로 규정한 기념판을 살펴보고 있다. [중앙포토]

는 그의 행적을 찾아다녔다. 동유럽 여러 곳에서 그를 추적했다. 암살 현장은 한 세기 전과 비슷하다. 그 뒤에 작은 박물관이 있다. 2014년 총성 100주년 때다. 대형 걸개그림이 건물 위쪽을 감쌌다. 양쪽에 프린치프(감옥 시절)와 황태자(프란츠 페르디난트)사진을 넣었다. 글귀는 인상적이다. ‘20세기가 시작된 길모퉁이(The street corner that started the 20th century, 1914~1918)’. 2차로의 모퉁이 건물이 박물관이다. 100년 전에는 카페. 암살자는 그 앞에서 순간을 낚아챘다.

21세기 동유럽 발칸반도

21세기 동유럽 발칸반도

그곳 주민 에르진 사리치(61)는 나의 동반자. 그의 젊은 시절 자부심은 사라예보 동계올림픽(1984년) 통역요원이다. 그는 “20세기는 1차대전 종전과 함께 시작됐다. 옛 체제와 질서, 사람이 집단 퇴장한 뒤다. 프린치프의 탄환은 빅뱅으로 작동했다”고 했다. 사라예보 풍광은 절묘한 공존이다. 다민족·다종교의 수려하고 아담한 도시. 옛 시가지에 무슬림 사원, 가톨릭 성당, 세르비아 정교 예배당, 유대교 예배당이 서 있다. 거기서 풍기는 불안한 매력이다.

프린치프(왼쪽)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한 길모퉁이(street corner)에서 20세기가 시작됐다. (박물관 위 걸개그림)

프린치프(왼쪽)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한 길모퉁이(street corner)에서 20세기가 시작됐다. (박물관 위 걸개그림)

프린치프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주민(Serb)’이다. 암살단 배후에 이웃 나라 세르비아 군부가 있었다. 그의 법정 진술은 선명했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다. 나의 목표는 남슬라브의 독립과 자유 쟁취다.” 그의 죽음은 결핵과 영양실조 때문이다. 그는 감방에서 저주를 읊었다. 그 주술은 이루어졌다. 1차대전 종전 이후 제국은 해체됐다. 독일제국도 붕괴됐다. 오스만 튀르크 제국(터키)도 와해됐다. 그의 열망은 성취됐다. 제국의 땅에 여러 나라가 생겼다. 발칸에 유고왕국이 들어섰다.

그가 추앙받을 시대가 왔다. 그는 자유의 영웅으로 추모됐다. 기념판이 만들어졌다(1930년). 대리석에 키릴문자로 새겨졌다. “На овом историјском мјесту, Гаврило Принцип навијести слободу, на Видов-дан 15 [28] јуна 1914(이 역사적인 곳에서 프린체프는 비도브단의 날, 1914년 6월 15일[28] 자유를 선언했다)”. 건물 외벽에 대리석판을 걸었다. ‘비도브단’은 세르비아계 사람에겐 장렬함이다. 1389년 6월28일 세르비아는 오스만 튀르크에 패망했다. 하지만 숭고한 저항이다. 프린치프 묘비명은 ‘비도브단의 영웅’이다.

모퉁이 건물은 지금 박물관.

모퉁이 건물은 지금 박물관.

프린치프의 삶은 파란이다. 기념판도 곡절이다. 내 친구 사리치는 옛날 신문기사를 보여줬다. 그는 사진설명문을 읽었다. “나치 독일 총통 히틀러의 52번째(4월 20일) 생일 선물. 사라예보에서 철거된 1차대전의 모욕적인 유산.” 그 선물이 프린치프 명판이다. 사연은 이렇다.

1941년 3월 말 2차대전 초기, 나치 독일군은 발칸에 진입했다. 유고왕국은 21일 만에 항복했다. 히틀러의 승리 구가 방식은 시각적 상징 조작이다. 그것은 복수욕의 독특한 과시다. 희생물은 프린치프 석판이었다. 1차대전 때 발칸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패배했다. 그것은 독일의 패배로 귀결되었다. 두 제국은 동맹국. 기념판의 ‘자유 (слободу)선언’ 구절은 히틀러에게 자극과 모독이다. 명판은 항복직후 철거됐다. 그는 총통 전용열차에서 그것을 받았다. 사진 속 히틀러는 팔짱을 낀 채 글귀를 응시한다.

틀러는 독일의 어두운 추억을 그렇게 제거했다. 그런 설욕 수법은 프랑스에서 써먹었다. 1940년 6월 독일은 프랑스에 승리했다. 22년 전 1차대전의 반대다. 그때는 독일이 패전국이다. 항복 조인식은 파리 근교 ‘콩피에뉴의 열차 객차’ 안이다. 히틀러는 역사를 복제해 반격했다. 나치는 객차를 꺼내 왔다. 같은 장소, 같은 형식으로 프랑스의 항복을 받았다.

유고 연방시절 박물관 벽에 새겨진 프린치프 기념판과 발자국.

유고 연방시절 박물관 벽에 새겨진 프린치프 기념판과 발자국.

콩피에뉴 객차와 프린치프 석판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옮겨졌다. 군사박물관에서 역사 노획물로 전시됐다. 1945년 히틀러 패망 직전이다. 객차는 다른 곳에서 파괴됐다. 프린치프 명판은 사라졌다. 사리치는 “히틀러는 프린치프와 유사점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거부와 타파다. 히틀러는 프린치프를 ‘슬라브 광신도’로 묘사한다. 그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다. 하지만 히틀러는 게르만 광신도다.

역사의 전개는 역전과 반전(反轉)이다. 나치 패전 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등장했다. 티토 시대(1945~80)의 개막이다. 프린치프는 역사의 영웅으로 다시 소비됐다. 기억의 현장에 새 석판이 새겨졌다(1953년). “프린치프는 이곳에서 자유에 대한 수세기의 국민적 항거와 열망을 권총으로 표출했다.” 건물 앞 보도블록에 그의 양 발자국이 새겨졌다. 크기는 그의 왜소한 신체만큼 작았다. 현장 앞 다리 이름은 ‘프린치프 다리’로 바꿨다. 200년 된 연극 소품같은 돌다리다. 그 밑은 밀야츠카 강. 서울의 청계천쯤 된다.

없어진 그 자리에 역사적 사실만 넣은 지금의 표식판.

없어진 그 자리에 역사적 사실만 넣은 지금의 표식판.

티토의 독재 통치술은 노련했다. ‘형제애와 통합’으로 나라를 이끌었다. 그의 죽음(1980년 5월)은 혼란과 공백이다. 연방은 6개국으로 쪼개졌다. 세르비아 대통령 밀로셰비치는 ‘대(大)세르비아’를 외쳤다. 그는 발칸의 도살자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세 민족, 세 종교의 혼합국. 세 민족 중 세르비아계는 거기에 호응했다.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는 저항했다. 보스니아 내전(1991~95년)이 터졌다. 20만 명이 숨지는 참혹한 유혈이다.

프린치프에 대한 평판과 기억도 갈렸다. 그는 세르비아계 출신이다. 사리치는 “그 때문에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은 프린치프를 거부한다. 그들에게 프린치프는 무모한 테러리스트”라고 했다. 내전 중에 프린치프 기념판은 없어졌다. 발자국도 깨져 지워졌다.

2014년 사라예보 동쪽 세르비아계 통치지역(스릅스카 공화국)에 세워진 프린치프 동상. [중앙포토]

2014년 사라예보 동쪽 세르비아계 통치지역(스릅스카 공화국)에 세워진 프린치프 동상. [중앙포토]

내전은 데이턴 협정으로 끝났다. 전시물은 재구성됐다. 암살의 의미부여는 피했다. 박물관 여성 봉사원 아미라 알레시치는 “프린치프는 민감하고 미묘하다. 관광상품으로 소화해 달라. 그의 행동에 민족주의 요소를 과도하게 넣으면 긴장된다”고 했다. 2004년 박물관 외벽에 안내판이 새겨졌다. 역사적 사실만 적었다. ‘비도브단’ 이야기도 없다. 다리 이름도 ‘라틴 다리’로 복귀했다.

그의 거사는 민족주의자들에게 매력적이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iH) 공화국은 1국가 2체제다. BiH연방(무슬림-크로아티아계)과 스릅스카 공화국(Srpska, 세르비아계)으로 나뉘어 있다. 2014년 거사 한 세기 후, 스릅스카 공화국은 프린치프 동상(2m 높이)을 세웠다. 2015년 세르비아도 비슷한 동상을 제막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밀랍인형. 옆은 박보균대기자.

박물관에 전시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밀랍인형. 옆은 박보균대기자.

김철민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프린치프의 총소리가 전쟁의 재앙으로 번진 것은 당시 유럽 정치·군사 리더십들의 오판과 무능, 어설픈 권위 때문이다. 프린치프의 거사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발로가 아니다. 후세 지도자들이 그의 애국주의 열정을 배타적으로 악용했다.”

파리의 1차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11월 11일)은 강렬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발언은 묵시론적이다. “민족주의는 애국심의 배신이다.” 민족주의와 애국심의 출발경계는 모호하다. 애국심은 순수하다. 민족주의의 저급한 속성은 폐쇄와 과잉이다. 그 단계에선 다른 집단과 다른 나라를 거부하고 도발한다. 프린치프의 탄환은 방황하고 있다. 애국심과 배타적 민족주의 사이에서 떠돌고 있다.

사라예보(보스니아)
콩피에뉴(프랑스)= 글·사진 박보균 대기자 bg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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