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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사생아는 어떻게 ‘품격’을 찾았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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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호 16면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42> 바트엠스: 인간의 품격

구소련 감독 예브게니 타슈코프의 6부작 TV 시리즈 ‘미성년’(1983)의 포스터

구소련 감독 예브게니 타슈코프의 6부작 TV 시리즈 ‘미성년’(1983)의 포스터

기차는 정오를 조금 지나 독일 남서부 란 강변의 작은 도시 바트엠스(Bad Ems)에 도착했다. 19세기에 바트엠스는 “황제의 온천장”이라 불렸다. 실제로 독일 황제와 러시아 황제가 이곳 온천장을 찾곤 했다. 지금도 유명한 온천수 치료센터가 있어 성수기 때는 사람들로 북적댄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날은 비수기에 토요일이라 상점이 모두 문을 닫아 무척 한산했다. 단풍이 곱게 물든 산과 장난감 같은 집들, 평화로이 흘러가는 푸른 강물이 음산한 날씨 덕분에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도스토옙스키는 천식을 치료하기 위해 총 네 차례 바트엠스에 갔다(1874년 6월 11일~7월 27일, 1875년 5월 28일~7월 3일, 1876년 7월 8일~8월 7일, 1879년 7월 17일~8월 29일). 만성 폐기종을 앓는 그에게 닥터 코슐라코프는 “바트엠스에서 6주간 요양을 하면 좋아질 것”이라 했다. 그는 비용과 시간이 아까워 영 내키지 않았지만,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기침과 호흡곤란을 견딜 수 없어 결국 혼자 바트엠스에 갔다.

온천장은 새벽 6시 30분에 문을 열고 두 시간 뒤인 8시 30분에 닫았다. 2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개장 시간 전부터 몰려들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7시에 약수 한 컵을 마시고 한 시간 산책을 한 뒤  또 한 컵을 마시고 귀가했다. 그는 “시큼털털하고 찝찔하고 썩은 달걀 맛이 나는” 약수가 너무  역겹다며 엄살을 부렸다. ‘올빼미형’ 작가인 그에게는 새벽에 일어나 한낮에 글을 써야 하는 것 또한 고역이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는 바트엠스가 점점 더 싫어졌다. 새벽부터 약수를 마시려고 모여 있는 ‘군중’을 보면 ‘인간 혐오증’에 걸릴 지경이라며 애먼 사람들 탓을 했다.

그러나 치료가 끝나갈 무렵 그는 “마른기침이 훨씬 덜하다”며 온천수 효과를 인정했다. 그러면서 “폐의 일정 부위는 완전한 치료를 거부하는 듯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쨌거나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증세는 호전되었다.

바트엠스에 머무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네 번째 장편 『미성년』을 구상했다. 소설은 이듬해인 1875년 1월부터 네크라소프의 잡지 ‘조국수기’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그는 그 해 5월부터 7월까지 다시 바트엠스에서 치료를 받으며 『미성년』을 집필했다.

‘불륜 소설의 탈’을 쓴 ‘교육 소설’

도스토옙스키가 천식을 치료하면서 소설 『미성년』을 집필한 독일 바트엠스의 란 강변. 오른쪽 사진은 바트엠스의 러시아정교 성당

도스토옙스키가 천식을 치료하면서 소설 『미성년』을 집필한 독일 바트엠스의 란 강변. 오른쪽 사진은 바트엠스의 러시아정교 성당

『미성년』은 다른 대작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종종 받는다. 얽히고설킨 치정사건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지루하다. 조금 성마른 독자는 ‘5대 장편’에서 배제하자는 주장까지 했다. 그러나 다른 네 편의 소설이 너무 막강해서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보일 뿐, 『미성년』 역시 만만히 볼 작품은 아니다.

소설은 귀족의 사생아인 스무 살 청년의 일인칭 회고로 전개된다. 20년 전, 젊은 지주 베르실로프는 영지 정원사 마카르 돌고루키의 아내 소피야와 시쳇말로 ‘눈이 맞았다.’ 얼마 후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 그 아들 아르카디가 바로 소설의 주인공이다. 베르실로프는 마카르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두 아이를 마카르의 호적에 올린 뒤 남의 손에 양육을 맡겼다.

그 후 재산을 다 탕진하고는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초라한 집에 법적으로는 여전히 마카르의 아내인 소피야와 거주하고 있다. 하루아침에 아내를 빼앗긴 마카르는 순례자가 되어 20년 동안 러시아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소설의 역사에서 불륜만큼 자주 등장한 소재는 없다. 톨스토이는 “불륜은 모든 문학작품의 거의 유일한 주제”라고 단정했다. 당시 러시아 현실 속에서도 불륜은 매우 ‘일반적인 일’로 간주되었다. ‘대개혁’의 여파는 사람들의 일상과 가치관으로 파고들었다. 산업화·도시화·세속화는 전통적인 도덕률의 붕괴에 불을 지폈다. “모든 것이 깨져왔고 깨지고 있다. 몇 개의 덩어리로 갈라지고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산산조각이 나고 있다.” 청년층은 결혼을 벗어나야 할 굴레라고 생각했고,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불륜이란 묵인되어야 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이혼률과 사생아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1892년부터 1894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1000명의 신생아 중 437명이 혼외 자식이었다는 통계까지 있다.

『미성년』은 불륜의 부도덕성을 심판하거나 결혼의 신성함을 사수하자고 외치는 소설이 아니다. 그건 톨스토이의 몫이다. 그는 언제나 불륜에 대해 엄정하고 단호했다. 『미성년』보다  2년 먼저 ‘러시아 통보’지에 연재되기 시작한 『안나 카레니나』에서 간음한 여주인공 안나는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크로이처 소나타』의 부정한 아내는 남편에게 살해당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불륜을 저지른 남녀가 아닌 사생아의 양육에 초점을 맞추었다. 친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소년이 자아를 확립해 가는 과정이 『미성년』의 핵심이다. 청소년 교육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이 ‘불륜 소설의 탈’을 쓴 ‘교육 소설’을 통해 터져 나온 것이다.

원망과 복수심 이겨내고 궁극의 자유 획득한 ‘진짜 귀족’

구소련및 러시아 화가 일리야 글라주노프(1930~2017)가 그린 『미성년』의 주인공 아르카디 일러스트

구소련및 러시아 화가 일리야 글라주노프(1930~2017)가 그린 『미성년』의 주인공 아르카디 일러스트

아르카디에게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어마어마하게 큰 돈을 벌어 ‘러시아의 로스차일드’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돈을 모으는 것은 철학이자 이념이다. “돈은 보잘것없는 인물까지도 최고의 지위로 끌어올려 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두 번째 목적은 생물학적 아버지 베르실로프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아르카디는 아주 어린 시절 단 한번 힐끗 본 생부를 문자 그대로 ‘갈망’한다. “베르실로프를 달라, 내게 아버지를 달라.” “단 한 번만, 꼭 한 번만 입니다! 아시겠어요, 사랑하는 아버지, 제가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허락하시겠지요?”

아르카디의 두 가지 목적 밑바닥에는 ‘트라우마’가 깔려 있다. ‘돌고루키’는 러시아의 해묵은 귀족 가문이다. 어쩌다가 농부 마카르가 그런 성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호적상 그의 아들인 아르카디는 어린 시절부터 놀림을 당해야 했다. 그가 자신을 ‘돌고루키’라고 소개하면 상대방은 “그럼 공작인가”라고 되묻고 그때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아니요 그냥 돌고루키에요”라고 대답했다. 나중에는 억하심정이 생겨 “아니요, 그냥 돌고루키에요, 주인 나리인 베르실로프의 피를  받은 서자일 뿐이에요”라고 소리를 질러 빈축을 샀다.

이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면 돈을 벌어 성공하고 아버지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목적의식은 희미해져간다. 돈도 아버지도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 한 집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느낀 환멸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은 내 공상, 어릴 때부터의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는 내가 꿈에 그렸던 것보다 훨씬 열등한, 내가 꿈꾸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삶을 통달한 마카르 돌고루키(왼쪽 그림)와 몰락한 귀족 베르실로프의 일러스트. 러시아 화가 글라주노프가 그렸다.

삶을 통달한 마카르 돌고루키(왼쪽 그림)와 몰락한 귀족 베르실로프의 일러스트. 러시아 화가 글라주노프가 그렸다.

방황하는 아르카디에게 방향을 제공해 주는 것은 농부 마카르다. 마카르가 소피야를 찾아오면서 소설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부정을 저지른 아내와 아내의 애인, 그리고 이른바 ‘오쟁이 진 남편’이 한 자리에 모인다. 그러나 관례적으로 독자가 기대하는 극적인 장면 대신 기묘하게 온화하고 평화롭고 가족적인 분위기가 조성된다. 마카르가 자신을 방랑의 길로 내몬 사람들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용서했기 때문이다.

아르카디는 “새하얀 턱수염을 기르고 멋지게 백발을 휘날리는” 노인의 “밝고 명랑한 미소”와 “아주 푸르고 반짝이는 커다란 눈”을 단박에 사랑하게 된다. “어쩌면 저는 벌써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마카르의 매력은 일자무식 농부의 순박함이나 수수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전 존재에서 묻어나는 극기와 겸손과 삶에 대한 기쁨이 아르카디를 매혹시킨다. 아르카디는 이 모든 것을 ‘품격’이라 부른다. 마카르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유난히 “품격” “기품” “품위” “고상함” 같은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아르카디는 마카르의 모습에서 자신이 그동안 줄곧 찾아왔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가 목말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품격’이었던 것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그리고 더 나아가 러시아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그들은 기품이 없어요.”

생물학적 아버지 베르실로프의 귀족 혈통은 이제 별 의미가 없다.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고 원망과 복수심을 이겨내고 궁극의 자유를 획득한 인간이야말로 진짜 귀족이다. ‘돌고루키’는 더 이상 ‘그냥 돌고루키’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돌고루키가 된다. 아르카디는 마카르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한다. “내 가슴이 기쁨으로 떨리고 뭔가 새로운 빛이 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이 느껴지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힘이 솟아오르는 순간”이었다. 그의 목표가 달라진다. “나는 지금부터 고상함을 추구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고상함을 배우기로 한 순간 아르카디는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건너간다.

무엇이 인간의 품격을 완성할까. 예의범절, 교양, 독서, 안목은 품격의 시작이지 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절제와 강인함과 너그러움과 자유로움을 배우고 익혀 자기 자신과 삶과 세계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 때 품격이 획득되는 것 아닐까. 학교와 가정에서 우리의 ‘미성년’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종류의 품격 아닐까. 그리고 그걸 가르치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고상한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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