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1년 노 대통령에 보내는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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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난번 선거 때 노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섭섭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으나 사실이니 밝혀둡니다. 그래도 당선되셨으니 잘해 나가시려니 하고 생각했었읍니다.
대통령취임 때부터 각하라는 존칭을 없애시는 것을 보고 이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진일보하나보다 하고 혼자 좋아했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도 그 칭호를 비판하는 글을 쓰기도 했읍니다.
취임하신지 벌써 1년이 돼가고 있읍니다. 세월이 빠르기는 하나 지난 1년은 참 지루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동안의 일로 서울올림픽이라는 큰 경사가 있었는데 불과 넉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어쩌면 그렇게 제 기억에서 아득한지요. 올림픽이라 하면 그렇게도 반대하던 일부 사람들이 끝날 때까지 단 한번의 사건도 일으키지 않았던 것이 소중한 기억으로 남습니다.
올림픽이 끝나자 동구권과의 교류가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연말에는 TV를 통해 5공 비리청문회방송이 있었읍니다.
그 동안도 물가가 조금씩 조금씩 오르고 있어 신경이 몹시 쓰였었는데, 해가 바뀌니 연초부터 들리는 소식은 부동산 값이 올랐다는 겁니다.
그동안 물가나 부동산 투기는 잠잠했었는데 지금 왜 이러는지요.
우리는 6공 출범 후 언론자유의 폭이 넓어진 사실을 확실히 인정합니다.
동구권과의 교류도 훨씬 자유로와진 것도 사실입니다. 심지어 북한의 물품을 사주기도 했고, 인적왕래가 있을 가능성도 엿보이는 등 고무적인 일도 있었읍니다.
그러나 백주 서울시내에 강·절도가 들끓고, 폭력과 사회기강의 해이에 대처하는 공권력의 무력은 답답함을 넘어 국민을 불안케하고 있읍니다.
요즈음 주부들은 오르는 물가가 불안하고, 집값·땅값 오르는 것에 기분이 나빠집니다. 종일 땀흘려 일해서 돈푼깨나 벌어도 집세 내다 만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며칠 전 시골에 가보았더니 멀쩡히 살만한 큰집이 버려져 있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탈농촌현상의 일면이라 합니다.
최근 여의도에서 있었던 일은 아주 큰 충격이었습니다. 죽창이 주는 역사적 이미지 때문에 더욱 그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노 대통령께서 하셔야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해방 후부터 조금씩 쌓인 나라의 제반 문제들이 쌓이고 부풀어서 6공의 대통령 등에 떠넘겨 겼으니 6공의 대통령은 누가 되어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들은 진작부터 하고 있었읍니다.
노 대통령께서 당선 전부터 누차 『믿어달라』하셨고, 또 지금도 하시는 터라, 또한 솔직이 말해서 더 뾰족한 수도 당장은 없는 듯 해 기왕이면 믿는 쪽이 마음 편해 믿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노 대통령은 6·29선언으로 평가를 많이 받으셨읍니다.
그 선언을 왜 좀더 일찍 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랬었다면 우리의 2세들인 그 젊은 학생과 전경의 희생이 없었을게 아닐까요. 『선은 서둘러라』라는 속담이 있읍니다. 나라를 위해 대통령이 되려던 분이 왜 우물쭈물 시간을 보내셨을까요. 그리고 지금은 어떠실까요. 사람들은 노 대통령을 여러 가지로 평합니다.
「허태우」라고도 하고 「물대통령」이라고도 한다지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부터가 자유로와진 것이고 세상 변한 것이지만 그러는 동안에 나라가 흔들려서야 되겠읍니까.
저는 대통령을 잘 모르기 때문에 멀리서 본 인상으로 좋은 점이 두 가지 있다고 말할 수 있읍니다. 그 하나는 분위기가 부드럽고, 또 하나는 인내심이 강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스꽝스럽고 세련미가 없는 구시대적 권위의식을 풍기시지 않아 참 다행스럽습니다.
저는 저의 생활에 바빠 대통령에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대통령께서 취임하신 후 많은 사람 입에서 답답하다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읍니다. 맺고 끊는 맛이 없다는 느낌인 것 같습니다. 저는 정치를 잘 모르지만 여소야대라는 것 때문입니까. 저의 소견으로는 그런 것을 극복하는 것이 정치이지, 여대야소라면 권위주의적으로 누구나 쉽게 해낼 수 있겠지요.
지금까지 나라경제가 놀랍게 발전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균형을 잃은 채 발전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는 균형을 잡을 때가 되었습니다. 균형 없이 사회가 안전하기는 힘들겠지요. 그동안 인명살상이 너무 많았습니다. 6공부터는 살상이란 아예 없도록 근본적으로 검토해 주십시오.
벌써 봄의 햇살이 아련합니다. 새싹도 움트려 하고있읍니다. 이 좋은 시절이 오면 저는 슬픔에 잠깁니다. 4·19와 5·18 때문입니다. 특히 5·18은 우리국민 모두의 영원한 십자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날은 해마다 사이렌을 울려 그 원혼들을 진혼하면 안될까요. 고문치사당한 어린 학생 박종철군의 넋과 이한열군의 넋을 진혼시키는 탑이라도 세웠으면 합니다. 이 나라 한 어머니의 이런 소박한 견해는 모기소리 일까요.
대학 신입생 때 저는 6·25를 겪었습니다. 그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직도 팔팔하게 살아있는데 요즈음 김일성의 일대기까지 출판되고있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읍니다.
노 대통령! 우리의 부모·형제·이웃과 벗들, 그리고 우리 세대와 또 우리의 2세들이 어떻게 지키고 이만큼 발전시킨 대한민국입니까. 대통령은 막중한 책임의 자리에 계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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