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교포들의 망향(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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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재즈가 흐르는 홀에는 젊은 교포 아가씨들이 매우 열정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한 귀퉁이에서 몸을 흔들고 있는 러시아 여성들보다 몸놀림이 훨씬 매끈해 좌중의 시선을 끌었다.
가슴팍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가 내게 다가왔다. 『땅고 하세요?』 땅고라니 그게 무어냐고 물었다. 그녀는 빠른 템포로 다리를 뻗었다가 팬터마임에서 보듯 고개를 좌우로 척척 돌리는 시늉을 했다. 『아-탱고』그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유즈노사할린스크의 레스토랑 「베첼」(저녁)은 한달에 서너차례씩 교포들에게 고고춤 장소를 제공한다. 20대에서 40대의 남녀들이 한바탕 흔들어 대고는 테이블로 돌아가 식사를 한다. 그들의 고고춤은 형형색색의 조명을 받진 못했으나 서울의 그것에 비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여성들의 귀걸이·목걸이, 그리고 밤의 분위기에 어울리도록 적당히 짙게 한 화장은 내가 예상했던 사할린 교포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훨씬 건강하고 표정도 밝고 명랑했다.
한 무리의 짖궂은 친구들은 『야, 키스도 좀 해라』며 소리질러 고고인들을 웃겼다.
50, 60대의 교포들 남녀가 몇개 테이블에 섞여 앉아 김치·깍두기·고사리·숙주나물에 보트카를 서로 권하며 『남조선기자가 사할린까지 오는걸 보니 우리들 신수 피는 날도 멀지 않았다』고 기뻐했다.
그들은 다른 교포의 자녀가 결혼을 했거나 또는 동년배들이 환갑을 맞았거나 하면 어김없이 베철로 모여들어 즐거움을 나누었다. 달이 바뀌면 바뀌었다고 모였다. 『오늘은 대한이여』라고 누군가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음력이 적힌 조그마한 달력을 보여주었다. 1월20일자 밑에 「대한」이라는 절후가 기록되었다. 한글신문「레닌의 길로」가 만들어 배포한 것이었다.
베첼의 주인 김재순씨는 보트카를 들고 두순배 그리고 세순배를 돌았다. 『우리에게 조국이란 무엇이냐. 조국은 조국이다.』 그는 약간 취해있었다. 양복깃에 서울올림픽마크나 호돌이 휘장을 단 그의 친구들은 아리랑을 흥얼거렸다.
그들은 기자 앞으로 많은 음식을 넘겨주었으나 너무나 많은 질문을 쏟아내 먹을 틈을 주지 않았다. 술이 거나해지자 그들은 기자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구말순씨(50)는 『KBS는 뭣하는 거요. 밤낮 방송만 했지 우릴 데려갈 생각도 안하고』라고 힐난했다.
주순녀씨는 허공에 손을 저으며 왔다. 『기자선생하고 문답해도 좋습니까.』혀 꾜부라진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몇 사람이 달려들어 그녀를 내 곁에서 떼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흐르는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55세쯤 돼 보이는 권임수 여인은 흑흑 울면서 『난 차라리 아무말 하고싶지 않아요』라며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주순녀씨는 업혀서 자동차로 옮겨졌다. 대한인 이날 밤 유즈노사할린스크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핏줄을 찾는 목마름 이상으로 조국애도 강했다. 그러나 그들은 감정표현에 매우 신중했다.『83년9월이었지요. 남조선 비행기가 사할린 부근에 떨어졌을 때 혹시 살아남은 동포는 없었을까. 누가 크게 다친채 바다에 떠있는 거나 아닐까하고 몹시 걱정했지요.』 한 교포는 그사건 이후 따스(타스)통신의 외신보도를 숙독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어느 교포 의사는 그 사건 때 중상자가 구출될 경우에 대비, 병원에서 비상대기 했었으며 『내 손으로 내 동포를 수술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흥분과 긴장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그때 국경경비대가 해안을 따라 수색을 계속했으나 여객기의 잔해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디다.』 P씨의 설명이다. 나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체재하는 동안 소련의 KAL기 격추사건에 대해서는 취재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들에게 부담을 주고싶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기자가 그 사건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자체한다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기자는 몇차례 젊은이들의 따끔한 질문에 움찔했다. 하루는 아주 매끈하게 차려입은 미모의 교포아가씨가 굳은 얼굴로 찾아왔다.
『76년 코르사코프사건(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탄원했던 이 지역 거주 교포 몇 가족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사건)때 한국정부는 왜 가만히 있었습니까.』 그녀는 대담하게 물어왔다. 『한국은 어깨서 지금까지 사할린 동포에 무관심했습니까.』 할말이 없었다. 한국정부는 그녀의 가슴아픈 질문에 답변해야할 것이다.
이미 소련적을 취득한 「이올냐」양(한국명 이옥·34)은 친구들뿐 아니라 통역까지 동행했다. 『용서하세요 조선말 잘 몰라요.』
그녀의 긴 이야기는 결국 『조국이 우릴 잊어버린거냐, 아니냐』하는 확답을 받고 싶어서였다. 박순복·박경순·백수옥양은 『우리들이 여기에 이렇게 있다는 것을 꼭 좀 전해주세요, 네』하며 다함께 글썽거린다. 사할린에서 태어난 2세들도 조국의 사랑을 목타게 기다리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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