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접 만나겠다!"…소음·더위 속 민원 받다가 뇌경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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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출범 후 국민인수위원회는 국민들의 정책제안을 수렴하기 위한 정책제안센터로 '광화문 1번가'를 운영했다. [사진 '광화문 1번가' 홈페이지]

새 정부 출범 후 국민인수위원회는 국민들의 정책제안을 수렴하기 위한 정책제안센터로 '광화문 1번가'를 운영했다. [사진 '광화문 1번가' 홈페이지]

행정안전부 공무원인 A씨(45)는 지난해 5월부터 서울 세종로공원에서 민원인들을 상담하는 일을 맡게 됐다. 새 정부 출범 후 국민들의 정책 제안을 직접 듣기 위해 마련한 일종의 정책제안센터였다. A씨는 광화문대로 옆 세종로공원에 컨테이너 2개를 연결해 만든 임시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6일씩 일했다.

파견 26일차 퇴근길, A씨는 집으로 가지 못하고 119구급대에 실려 병원으로 가야 했다. 그날은 내내 큰 소리로 일해야 했던 날이었다. 광장에선 8000명이 모인 집회가 벌어지고 있었고, 퇴근 직전 찾아온 고령의 민원인은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앞이 모두 뚫려있는 컨테이너에는 6월 말의 더위가 그대로 전해졌다.

A씨가 일했던 '광화문 1번가' 모습. 앞이 개방된 임시 사무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민원인들을 만났다. [사진 '광화문1번가' 홈페이지]

A씨가 일했던 '광화문 1번가' 모습. 앞이 개방된 임시 사무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민원인들을 만났다. [사진 '광화문1번가' 홈페이지]

A씨는 상담 도중 어지러움을 느껴 업무를 중단했지만, 어지러움은 퇴근길에도 계속됐다. 토할 것 같은 증상에다 걸음이 자꾸만 오른쪽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A씨는 그날 병원에서 '뇌경색증' 진단을 받았다. 뇌경색은 뇌의 혈관이 막혀 뇌조직이 죽는 병으로 겨울철 노년층에서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A씨는 "급격한 업무환경 변화와 업무상 부담이 증가돼 병을 얻게 됐다"며 공무상요양 승인신청을 했다. 하지만 공무원연금공단은 "A씨는 일상적이고 통상적인 일을 해왔다. 뇌경색은 A씨의 체질적 소인이나 지병성 요인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며 거절했다. A씨는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일 때문에 뇌경색이 발병했다"는 A씨와 "일 때문 아니다"는 공무원연금공단의 다툼은 7개월 가까이 이어졌다.

국민인수위원회는 세종로 한글공원에 모듈형 컨테이너 방식으로 광화문1번가를 설치하여 5월 25일부터 7월 12일까지 50일간 운영했다. [사진 '광화문 1번가' 홈페이지]

국민인수위원회는 세종로 한글공원에 모듈형 컨테이너 방식으로 광화문1번가를 설치하여 5월 25일부터 7월 12일까지 50일간 운영했다. [사진 '광화문 1번가' 홈페이지]

지난달 25일, 서울행정법원 행정6단독 심홍걸 판사는 "공무원연금공단은 A씨의 요양신청을 받아줘야 한다"고 판결했다. 심 판사는 "질병의 주된 발생 원인이 공무와 직접 연관이 없다 하더라도 직무상의 과로 등이 겹쳐 질병을 유발시켰다면 인과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심 판사는 "앞면이 완전히 개방된 임시 사무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민원인과 하루종일 상담을 하는 상황을 공무원의 통상적인 근무환경으로 보긴 어렵다"면서 "A씨는 원래 정책제안을 받는 일을 하기로 돼있었으나, 민원상담 업무를 더 많이 했고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봤다. 민원인 중에서는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라" "대통령과 직접 면담하겠다"는 요청을 하거나, 화가 나 욕설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행정법원. 사진 문현경 기자

서울행정법원. 사진 문현경 기자

심 판사는 "발병 당시 A씨는 무더위와 소음 속에서 업무를 하다 귀가 어두운 고령의 민원인과 자신이 해결하기 어려운 판결 내용 등에 관해 큰 목소리로 대화를 했는데 이것으로 인해 A씨에게 생리적 변화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A씨는 흡연을 전혀 하지 않고 술도 일주일에 1회 2~3잔 정도로 마시는 등 철저하게 건강관리를 하는 등 다른 뇌경색의 원인을 찾기 힘들다"고 봤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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