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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눈내리는 임진강 기슭에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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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먼 전화로 시인 김남주가 무등산 밑에서 결혼식을 하겠다고 말했다. 나더러 그 식장에 서달라 했다. 그러마고 하고 나서 나는 그 전화 이전까지 쓰던 글이 끊겨져서 영영 이어지지 않았다. 말하자면 말이 막힌 셈이다.
말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인지 모른다. 하지만 말은 그 한계를 넘어서서 반드시 세계를 다시 걸치지 않을수 없다.
오늘은 어쩌자고 눈이 내린다. 눈 가물이 실컷 든 이상스러운 겨울에 눈 내리는 날 나는 한군데 처박혀 있는 그 알량한 정신주의의 권위보다는 철딱서니 없는 동심 쪽으로 기울어져야했다. 그것은 아무 마을의 코흘리개 아이들이나 삽살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런 동심이겠다.
남으로 가기 전에 북으로 길을 나섰다. 여기서 북이래야 파주땅 문산 아니겠는가. 산성비가 내리는 판국이라 눈인들 산성눈이다. 그 눈이라 해서 새삼 겁낼 것 없다.
무턱대고 불광동에서 버스를 탔다. 지난해 임진각통일축전으로 향하던 그 길이다.
버스의 앞장은 부지런한 윈도 브러시로 겨우 눈 내리는 길이 내다 보였다. 그곳으로 운전사의 시선이나 앞자리 승객들의 시선이 총동원되어 있었다.
어쩌다가 옆창으로 보이는 경기 북부 파주땅 일대의 침중하면서도 금욕적인 겨울경개에 대한 내 시선도 부지런떨어야 했다. 아마도 내 눈은 죽기 전까지는 늘 이럴 것이다. 그 어디서든, 그 어느 때든.
차츰 우울해졌다. 그래서 일부러 어떤 기억 하나를 살려냈다.
지난날 작고시인 조지훈과 술상머리에 마주 앉아 제법 시와 선에 대해 말을 주고받은 일이 그것이었다. 그때 그는 마침 눈이 내리는 날 문열지 않고도 그 눈이 다 보인다는 즉흥시를 읊어냈다. 옛말로 하면 게송이요, 오늘의 말로 하면 선시다. 나는 그 시가 나오자마자 닫힌 문을 활짝 열어 제킴으로써 화답했다. 눈발이 찬 바깥 기운과 함께 방안으로 몰려들었다.
우리는 껄껄껄 웃었다.
버스는 더 이상 갈수없는데까지 가서 섰다. 나는 몇 군데를 거쳐 드디어 임진강기슭에 다다랐다. 휴전선이래 서너 번째로 찾아온 것이다. 함박눈송이는 오랜 세월의 긴장 가운데서 한번도 잠들어보지 않은채 항상 눈뜨고 있는 듯한 적의를 떠올리게 하는 검푸른 강물에 닿자마자 녹아버리고 만다. 그야말로 산화였다.
강 건너 삭막한 두 산등성이에 「자」와 「주」가 큰 글씨로 하얗게 박혀있다. 말인즉 얼마나 좋은 말인가. 단소사관으로 시작해서 이것만이 우리의 진정한 역사 주제가 아니던가. 그래서 지금껏 남북의 우리 모두에게 자주라는 말만큼 통절한바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분단의 강 기슭에서 바라보는 「자」, 「주」는 이제까지의 내 동심을 일단 앗아가 버렸다.
언젠가는 저 산등성이에 저런 글씨 박아놓는 일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자주의 시절이 올 것이다. 그때 저 산은 본래의 산으로 돌아감으로써 늦여름 구절초 캐러 나온 아낙네로 떠들썩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주 이후요, 자주이상이다.
그 글씨에 행여 질세라 강 건너 확성기는 지칠 줄 모르는 선전 선동의 최전방 대남 연설을 보내고 있다. 이쪽에서도 가요의 구슬픈 곡조를 보내고 있다.
청동기시대로부터 사람이 삭기 시작한 이 임진강 유역은 역사이래 가장 파란곡절이 자심해온 곳이다. 온조백제의 것이었다가 비류백제의 것이기도 했다가 고구려의 것이 되었고, 그러다가 신라의 것이 되어 오늘의 북위39도선 어름으로 북의 발해와 대치되는 고대 남북조시대를 이루기도 했다. 강산은 묵연하되 이 강산의 역사에는 단 하루의 무고도 어렵게시리 불안의 연속이었다.
그런 고난의 풍운이 절정을 이룬 것으로 어찌 6·25가 아니겠는가. 그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하여금 입진강 기슭의 파주군내 양공주만 해도 1천명 이상이었다. 파주당 산과 들에 기지가 있는 게 아니라 기지속에 산과 들이 있다고 해야 옳을 정도로 마을들은 미군기지가 에워싸고 있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루가 가면 다시 하루가 온다. 오고 감을 허망타 하지 말라. 여기에 오묘한 운행과 엄연한 법칙이 없지 않다. 이렇게 참다운 세월의 어느날! 그날이야말로 이 땅 3천리강토를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내는 위대한 축복의 날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도 그런 날의 하루와의 약속이자 확신 아니겠는가.
임진강 기슭의 벼랑에 둘러쳐진 철조망이 걷히고 그 벼랑 아래로 조심스레 내려가서 임진강 배를 타는 날이 바로 그날로부터의 감격이 될 것이다.
예로부터 임진강은 물살이 빠르기로 소문났다. 이를테면 백마강이나 남강의 느릿느릿한 흐름의 평화와는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그 강기슭은 층층 바위가 괴어져 있어 뱃놀이는 다만 임진에서만 알맞다는 시 한 귀절도 있음직하다.
임진강 위쪽의 한탄강 일대까지도 그렇고 그 위쪽은 더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임진강 유역의 풍광만을 말할 짱장은 없다. 그 얼마나 많은 인명이 이 강을 두고 죽어갔던가. 당장 50년대의 전쟁만 하더라도 여기서 총칼 맞은 사람들로 하여금 강물이 붉어진 것도 사실이다. 시산혈해란 어휘가 어찌 그리도 자주 들먹여야 하는 노릇이었던가.
나는 어떤 사연을 여기서 들은바 있다. 해마다 여기에 와서 부모의 제사를 드리고 가는 어떤 전쟁고아 출신의 40대 남자에 대한 얘기가 그것이다. 그는 늘 이곳의 제사 음복이 과해서 끝내 울며불며 주난을 부리고 돌아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도 한잔 털어 넣지 말라는 법이 없다. 소주 한병 비우는 솜씨하나는 자칭 원숙의 경지다.
이렇게 눈 내리는 정복에 거나해지는 음복이건만 내 심상은 제법 창연한 바 되어 이 땅의 기구한 삶 가운데 제대로 살지 못하고 쓰러져간 사람들에 대한 죄책이 여실치 않을 수 없다. 오늘내일 뿐 아니라 어느 날 하루도 따지고 보면 그냥 평일이 아니다. 역사로부터의 희생으로 역사를 계승할 수밖에 없는 땅의 허실에서는 어느 날이나 추도의 날이고 제일인 것이다. 제주도에는 4·3으로 온통 한 마을이 제삿날이 되어 있기도 하다.
어느 연표를 들추어보거나 어느집 달력을 들추어보거나 거기에는 1년 3백65일 거의 전부가 어떤 잊을 수 없는 사연의 기억과 추체험의 날들인 것이다.
얼마전 우리는 박종철군의 2주기 추도를 마쳤다. 악독한 고문학살로 스무살 청춘을 마친 그의 시체조차 빼앗겨 임진강 한 갈래의 물에 한줌 유골가루가 되어 뿌려지고 만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부르짖었다. 『종철아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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