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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문명기행

임진강에서 훈련하던 거북선, 더 많았더라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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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알렉산드로스의 빛나는 제국 건설에 마케도니아의 민초들이 열광했을까. 나폴레옹의 화려한 정복 원정에 프랑스 국민들은 행복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승전보를 즐길 여유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잖아도 견디기 팍팍한 삶의 무게에, 막대한 전쟁 비용까지 더해 허리가 짓눌렸을 터다.

정복 전쟁은 가진 자들의 사치 #승리의 결실도 지배층들만의 몫 #민초들은 맘 편한 생업 바랄 뿐 #역사는 정복보다 유비무환 중요

정복 전쟁은 가진 자들의 사치다. 비용이 많이 드는 취미활동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환상을 불어 넣는다. 하지만 지도상에서 국경선이 길어진들 민초들의 삶이 나아질 게 무에 있으랴. 성공의 결실은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한 권력자와 전비를 댄 자본가들의 몫이다.

민초들이야 국가가 그저 마음 편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해주면 그만이다. 영토 확장을 위해 수백 년 이상을 싸워온 과거 유럽인들과, 오늘날 여권도 없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유럽인들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하겠나.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국적이 다섯 번이나 바뀐 알자스 지방 사람들의 삶에 국적이 뭐 그리 큰 의미가 있을까.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은 프랑스 민족주의적 시각이 반영된 현실 왜곡일 뿐이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고대 국가들의 영토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고구려·백제·신라 그 어느 나라 백성이 된들 어떠랴. 어차피 내 삶의 터전이 달라질 게 없는 것을. 그 땅에 전쟁으로 인한 살육과 파괴만 없으면 어떻게든 입에 풀칠하며 살아볼 것을…. 하지만 지배자의 논리는 그렇지 않다. 패권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산하를 차지하려는 전략적 판단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랑과 복수, 배신 같은 비합리적 감정이 전쟁을 결정하기도 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정(南征) 역시 그렇다.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전사에 대한 복수의 성격을 무시할 수 없다. 고국원왕은 백제의 공격에 맞서다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그는 백제와 세 번의 싸움에서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가 모자랐다기보다 상대가 워낙 강했던 것이다. 백제의 최전성기를 연 근초고왕 아닌가.

임진강 황포돛배. 올여름 두 번 찾았는데 침수와 정원미달로 한 번도 타지 못했다. 맘 편히 삶을 영위하고픈 민초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훈범 기자]

임진강 황포돛배. 올여름 두 번 찾았는데 침수와 정원미달로 한 번도 타지 못했다. 맘 편히 삶을 영위하고픈 민초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훈범 기자]

고국원왕의 불운에는 배신도 한몫 거들었다. 369년 고국원왕은 친히 2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을 향했다. 백제는 태자인 근구수가 군대를 이끌고 나왔다. 양군은 오늘날 황해도 연백으로 추정되는 ‘치양(雉壤)’에서 대치했다. 이때 고구려군에 원래 백제인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에 도망 온 ‘사기’란 자가 있었다. 사면 받을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을 그는 몰래 백제군을 찾아가 고구려군의 약점에 대해 고한다. “고구려군의 수가 많기는 하나 대부분 오합지졸입니다. 붉은색 깃발을 든 부대만이 날래고 용감한 정예군이니 이들을 먼저 깨뜨리면 나머지는 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고구려는 백제와의 첫 대결인 이 싸움에서 대패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작은 배신 하나가 역사를 바꾸는 일은 허다하다. 그 유명한 테르모필레 전투가 딱 그렇다. 협곡을 막고 페르시아 대군에 맞서 선전하던 스파르타군 300명이 전멸한 것도 페르시아군에 우회로를 알려준 그리스인 배신자가 있었던 까닭이다. 임진왜란 때도 조선 어부 한 명이 군대가 걸어서 도강할 수 있는 임진강 여울목 위치를 알려준 것이 왜군의 빠른 진격을 가능케 했다.

뜬금없는 애정 타령이 전쟁에 끼어들기도 한다. 고구려 안장왕이 태자로 있을 때 상인 차림을 하고 백제 땅이었던 개백(皆佰·오늘날 행주)에 갔다가 절세미녀인 한주를 만났다. 주와 부부의 연을 맺고 태자는 “내가 돌아가 군사를 일으켜 이곳을 차지한 뒤 그대를 데려가리라”고 약속을 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그가 여러 번 백제를 쳤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때 고구려 장수 을밀이 안장왕의 동생 안학을 사모했다. 백제에 승리하면 누이를 주겠다는 왕의 약속을 받은 을밀은 온 힘을 다해 백제군을 물리쳤다. 고구려는 개백 땅을 얻고 왕은 한씨 미녀를 얻었으며 장수 을밀도 사랑하는 여인을 얻었다. 하지만 그 땅의 백성들은 얻은 게 하나도 없었다.

고구려가 차지하기 전 개백의 태수가 주에게 눈독을 들였다. 주는 옥중에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전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고 넋이라도 있건 없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흔히 정몽주 원작으로 알려지고 있는 단심가다. 백제 땅 한씨 미녀의 작품이 고려 말 정몽주에 의해 리바이벌되고, 그녀 이야기가 조선조에 와서 『춘향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원작자가 잘못 알려진 사례가 또 임진강에 있다. 바로 거북선이다. 흔히 이순신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의 것이다. 기록상 처음 보이는 건 『태종실록』이다. 태종 13년(1413)에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 귀선(龜船)과 왜선(倭船)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2년 뒤에는 좌대언 탁신이 귀선을 만들어 대비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다.

이를 보면 거북선은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던 여말선초에 이미 있던 것인데, 어찌 그 훌륭한 발명품을 발전시키기는커녕 내팽개쳐뒀다 봉변을 당했는지 참으로 딱한 일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민초들이었다. 야심을 위한 정복보다 무환(無患)을 위한 유비(有備)가 먼저다. 임진강을 떠나며 느끼는 단상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