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의식한 문 대통령 “제재 틀 속에서 남북관계 개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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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5호 08면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오전 청와대에서 영국 BBC방송의 로라 비커에게 지난달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부터 받은 풍산개 곰이와 송강이를 소개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BBC와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은 시기의 문제일 뿐 반드시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사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12일 오전 청와대에서 영국 BBC방송의 로라 비커에게 지난달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으로부터 받은 풍산개 곰이와 송강이를 소개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BBC와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은 시기의 문제일 뿐 반드시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사진 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선언과 대북 제재 해제 등 북한이 요구해온 ‘비핵화 상응 조치’를 놓고 최근 불거진 한·미 간의 불협화음 진화에 나섰다. 문 대통령은 12일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얘기는 일정한 단계까지 한국이 국제적인 제재에 대해 한·미 간에 긴밀하게 협력하고 보조를 맞춰 나가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씀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지난 10일(현지시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5·24 조치 해제 검토’ 발언에 대해 “그들은 우리의 승인(approval) 없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첫 입장 표명이다. 문 대통령은 또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도 국제적인 제재의 틀 속에서 그 제재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부터 시작하려고 한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한·미 불협화음 진화, 불씨는 남아 #BBC 인터뷰서 기존 입장 재확인 #트럼프 ‘제재 완화 미 승인’ 발언엔 #“보조 맞춰 나가자는 원론적 말씀” #미 전문가 “능숙한 동맹외교 필요”

하지만 전문가들은 ‘비핵화 상응 조치’를 둘러싼 한·미 간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인터뷰에서 단계적 제재 완화를 시사했다. 그는 “북한의 비핵화가 어느 정도 단계에 도달하면 그때부터는 북한에 대한 경제 제재를 서서히 완화해 나가는 것까지도 진지하게 검토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최근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비핵화 이후에 (남북) 경협을 하자면 임기 5년 차에 하자는 말인가”라며 “제재는 북한 도발에 중첩적으로 강화된 만큼 비핵화 조치를 하나씩 취하면 역순으로 제재를 단계적으로 해제할 필요가 있다. 연말연시에는 뭔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제재를 지속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과는 결이 다른 얘기다. 앞서 미 재무부는 지난달 20~21일 이례적으로 한국의 국책은행인 산업·기업은행과 일부 시중은행 등과 전화 회의(컨퍼런스 콜)를 열어 대북 제재 준수를 요청할 정도로 여전히 강경하다.

평양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강경 입장을 보여온 상황에서 한국 측에서 이에 동조하는 듯한 발언이 나왔다는 점도 향후 한·미 공조에 ‘불편한 기억’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회담 이후 “일방적인 핵 무장 해제는 없다. 상응 조치를 취하라”(9월 29일 이용호 외무상 유엔 총회 연설) → “종전선언은 비핵화 조치와 맞바꿀 흥정물이 아니다”(10월 2일 조선중앙통신 논평)에 이어 12일엔 "100년이고 제재를 하겠으면 하라”(노동신문)고 주장하면서 미국을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 장관의 ‘핵 리스트 신고를 뒤로 미루자’는 제안(10월 3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 이어 ‘5·24 조치 해제 검토’ 발언까지 연거푸 나왔다. 워싱턴 조야에 한국이 북한의 주장에 경도된 것이 아니냐는 인상을 준 것이다.

연내 종전선언 채택(판문점 선언)과 남북 철도·도로 연결 착공(평양 공동선언)을 북한과 합의한 데 이어 개성공단 가동과 금강산 관광 재개까지 의욕을 보여온 정부는 시간에도 쫓기고 있다. 서울의 한 외교소식통은 "11월 미국 중간선거 이후 연말까지 두 달이 채 안 남았다”며 "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와 종전선언 채택을 성사시킨 후 내년부터 본격적인 남북관계 개선을 추진하기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맥스웰 민주주의수호재단(FDD) 선임연구원은 현재 한·미 관계와 관련, 이날 중앙SUNDAY에 "이번 사건은 본질적으로 동맹 내부의 큰 알력을 드러낸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제재와 최대한의 압박을 유지하길 원하지만 한국은 김 위원장의 경제개발 계획을 실현하는 걸 돕기 위해 최대한 포용(관여)에 무게를 두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한·미 간 이견을 절충할 방법은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능숙한 동맹외교와 일관되고 조율된 전략이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당장 양국 간 이견 조율의 1차 시험대는 정부가 이달 중 목표로 추진 중인 남북 철도·도로 연결을 위한 남북 공동 현지 조사다. 현지 조사를 위해선 군사분계선(MDL) 통과가 필수적인데 이는 주한미군사령관이 겸직하고 있는 유엔군사령관의 승인 권한이다. 앞서 지난 8월엔 유엔사의 반대로 MDL 통과가 무산된 적이 있다.

◆남북 고위급회담 15일 개최=통일부는 9월 평양 공동선언 이행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남북 고위급 회담을 15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개최키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서울=차세현 기자,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cha.se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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