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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온 '3D 입체 애니 선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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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 장면 1. "코리아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보겠다고? 말도 안돼(No Way)."

때는 1970년대 중반. 미국의 유명 애니메이션 감독 랄프 박시는 UC샌디에이고에서 영화를 전공한 한인 청년 스티브 한의 작품 하청 요청을 대번에 거절했다. 하청이란 애니메이션에 필요한 그림 일부를 지시대로 대신 그려주는 것. 하지만 청년은 집요했다. 결국 박시는 자신의 신작 일부를 넘겨주고야 만다. 하지만 그날 저녁,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다시 돌려달라는 전화를 받고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아, 그 작품요, 이미 한국에 보냈는데요."

자신의 거짓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그는 온갖 정성을 들였다. 한국인의 손재주와 꼼꼼함이 미국에 본격적으로 수출되기 시작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전까지는 주로 일본에 한정돼 있던 애니메이션 하청이었다. 그 뒤 한국은 세계 3위의 애니메이션 제작국가로 발돋움하기에 이른다.

# 장면 2. "이제 하청은 지겹다. 내 작품을 만들어야해. 그것도 남들이 하지못하는 걸로."

1970대 중반 국내에 동서동화와 한호흥업을 연달아 설립하고 수많은 미국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수출하던 스티브 한은 창작물에 도전한다. 당시 인기가 있었던 3D 입체 영화를 애니메이션에 적용한 '스타체이서'였다. 3D 입체 애니메이션은 왼쪽과 오른쪽 눈이 보는 각도를 각각 계산한 뒤 그린 두 장의 그림을 한 필름에 겹쳐 촬영, 특수 안경을 쓰고 보면 마치 눈 앞에서 그림이 둥둥 떠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정교한 계산이 필요해 캘리포니아 공대생 6명을 불러 6개월간 연구했지요. 250만 달러를 들여 1년 정도면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작비는 그 네 배가 넘었고 기간도 2년 6개월이나 걸렸죠. 나중에 알고 보니 디즈니도 만들다 포기했다고 하더라고요."

미국 내 1100여 개 극장에 걸려 개봉 첫 주 450만 달러라는, 당시로선 나쁘지 않은 흥행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배급사의 갑작스런 파산선언으로 기나긴 재판이 시작됐고 그 와중에서 그는 모든 꿈을 거둬들여야 했다.

그런 스티브 한(65)감독이 오랜만에 한국을 찾았다. 24일 개막하는 제10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서 애니메이션 부문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로 3D 입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국 시장 진출에 기여한 공로다. 마침 올해는 '스타체이서'를 개봉한 지 꼭 20년 되는 해다.

"그땐 참 범 무서운 줄 모르던 하룻강아지였어요. 이번에 주시는 상은 그 무모함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는 그 뒤 미국에서 애니메이션 제작에 몰두해오다 약 1억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실사 영화 '더 포털(The Portal)'의 공동 프로듀서를 최근 맡았다. 그는 "특수효과 파트는 한국 기술력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밝혔다. 4500만 달러 규모의 '퍼스트 펫'이란 3D 애니메이션도 기획중이다.

그는 "작품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스토리, 둘째도 스토리"라고 강조했다. 한 감독은 "지금 한국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들이 많이 필요한 때"라며 "그런 젊은이들이 한국의 희망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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