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5일 오전 9시55분 한국경영자총협회를 찾았다. 취임 인사차 의례적인 방문처럼 보였다. 그러나 방문 과정과 경총 관계자와의 대화 내용은 전임 김영주 장관 때와는 사뭇 달랐다. 김 전 장관 때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러나 이 장관과 손경식 경총 회장 간에는 오랜 친구 같은 편안함이 묻어났다.
이 장관의 경총 방문은 취임 후 노사단체 가운데 첫 접촉이다. 지난달 21일 한국노총을 찾았지만 취임 전이었다. 더욱이 경제단체 가운데 경총을 예방의 첫 순서로 택했다. 김영주 전 장관은 중소기업중앙회와 대한상공회의소를 방문한 뒤 경총을 맨 마지막에 찾았다. 정부 정책에 우호적인 경제단체를 우대하면서 경총을 홀대하는 모습을 연출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 장관, 경총을 첫 취임 인사차 예방 단체로 택해 #전임 김영주 장관 때와 사뭇 다른 대화 분위기 연출 #사회적 대화에 관한 한 경총에 경영계 맏형 역할 주문 #근로시간 유연화, 최저임금 제도 개선 논의 약속 #손경식 회장 "장관 부임 후 발전할 것" 기대감 전달
이 장관은 전임 장관과 정반대로 경총→대한상의→중기중앙회로 예방 순서를 짰다. 이에 대해 고용부 고위관계자는 "고용부의 허가를 받은 유일한 사용자 단체이자 사회적 파트너는 경총"이라며 "사회적 대화를 이끌어갈 단체에 대한 예우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장관은 손 회장에게 "경총이 사회적 대화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을 잘 안다"며 "경총이 사회적 대화가 본격 가동되면 주도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12일 노사정 대표의 만남을 시작으로 본격화할 사회적 대화에서 사실상의 경제계 맏형 역할을 주문한 셈이다.
손 회장은 "노사문제가 형평과 안정을 찾아야 하는 시점에 장관께서 부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으니 발전적이길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지난해 9월 김영주 전 장관이 취임 인사차 경총을 찾았을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당시에는 "장관께서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업무를 하실 것으로 기대한다"는 박병원 당시 경총 회장의 인사말에 김 전 장관은 "경영을 하지 않은 경제단체 대표라서 합리적 얘기를 할 것으로 본다"며 가시가 돋친 맞대응을 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 출신이 아닌 옛 재정경제부 차관 출신이라는 점을 꼬집으며 정부 정책에 협조하라는 충고로 비쳤다.
이후 경총은 고용보험위원회에서 퇴출당했다. 당시 이낙연 국무총리가 김 전 장관에게 경위를 따지며 질책했지만 경총은 고용보험위원회에 복귀하지 못했다. 당시 김영주 장관 취임 인사 자리에 배석했던 김영배 당시 경총 부회장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심지어 이 장관 취임 한 달 전에는 고용부 직원 10여 명이 경총에 들이닥쳐 일주일간 업무를 샅샅이 뒤지는 굴욕까지 당했다. 1970년 경총이 고용부로부터 사용자단체로 허가를 받은 이후 처음 벌어진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이런 사정을 의식한 듯 이 장관은 "손 회장님을 사회적 대화의 장에서 모시게 된 것은 감사할 일"이라며 유일한 사회적 대화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치켜세웠다.
이어진 비공개 간담회에서 이 장관과 손 회장은 최저임금 제도개선, 근로시간 단축 등 산적한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손 회장은 "근로시간 단축 문제는 업종에 따라 다르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단일 제도로 규율하기 어려움이 많다"며 "제도 적용에 유연성을 기해달라"고 건의했다. 이 장관은 "근로시간 단축에 대한 실태조사가 끝나는 대로 노사의 의견을 수렴해 보완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답했다.
최저임금에 대해 손 회장은 "임금의 국제 경쟁력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고 운을 뗐다. 그러자 이 장관은 "최저임금으로 인한 현장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며 합리적 방안을 찾아 관계 부처와 협동할 수 있게 하겠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제도개선에 대해서도 이 장관은 "국감이 끝나면 법안 심의가 있을 텐데, 그때 개선할 것들이 있으면 논의하겠다"고 답하는 등 시종 경총의 의견을 면박하기보다 적극 수렴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