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년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한국 사람의 시간 관념을 둥근원에 비유한 학자가 있었다. 굴렁쇠 모양으로 시작도 끝도 없이 과거와 현재가 서로 꼬리를 물고 돌아간다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만 해도 무슨 일이든 앞으로 뚫고 나아가는 프런티어 정신을 앞세운다. 미식축구의 룰을 보아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만 이긴다. 이들의 시간 관념은 직선형이다.
일본 사람들도 그 점에선 비슷하다. 그들은 깨끗하게 과거를 잊고 『지금부터다』라는 말을 잘 한다. 활짝 피었다 폭삭 지고 마는 벚꽃을 유독 좋아하는 것도 그런 시간 관념과 상통한다. 앞도, 뒤도 없는 순간에서 의미를 찾으려한다. 학자들은 그것을 선분적인 시간 관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과거에 집착하는 끈질김이 있다. 모든 문제를 언제나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려 한다. 요즘 국회 청문회도 결국 과거를 똑바로 검증하자는데 뜻이 있다. 또 그 검증은 원칙과 윤리성을 따지기 위한 것이다.
이런 시간 관념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대로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지나간 일들은 하나같이 맺고 끊는 것 없이 꺼림칙하고, 후회스럽고, 어둡기만 한 채 덮어두기만 했다. 그것을 최상의 미덕으로 여겨왔다. 바로 가까운 역사의 면면이 그렇지 않은가.
어영부영 시간만 지나가라 하고 덮어두면 망각이라는 양탄자로 말끔히 가려지곤 했다. 그것이 바로 악순환의 연속으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그것은 원한으로 남아 두고두고 지나간 일에 집착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선 앞을 보고 나아갈 겨를이 없다.
지난 한해는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물게 과거를 씻는 노력을 경주해왔다. 아직 그 작업은 끝나지 않았지만 어두운 과거는 이제 좀 정리해야한다는 것이 국민적인 요구다. 만일 이런 요구가 믿음직스럽게만 이루어진다면 우리도 이제는 과거의 족쇄에서 풀려나 새로운 시간 관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올해의 망년회는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털어 버리는, 시작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저 술이나 마시고 흥청거리기에는 우리는 잊어야 할 과거들,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너무도 많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