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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서 미안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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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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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장편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시종일관 유쾌하다. 소설은 2005년 5월 2일 100세 생일을 맞은 알란이 멀쩡한 문을 놔두고 창문 넘어 양로원을 탈출하면서 시작된다. 잠옷 바람에 ‘오줌 슬리퍼’를 신은 채로 복지국가 스웨덴이 자랑하는 안온한 양로원을 떠나 모험에 나선다. ‘이제 그만 죽어야지’하면서 포기하거나 주눅 들지 않고 남은 인생을 즐기기로 결심한 것이다.

소설은 양로원을 떠난 알란의 좌충우돌을 그리면서 세계사의 고비마다 본의 아니게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100세 이전의 알란 개인사를 함께 보여준다. 보잘것없는 소시민 알란이 스페인 내전에서 독재자 프랑코 장군을 살리고, 소련에선 레닌과 스탈린을 만나며, 미국에선 해리 트루먼과 술친구가 돼 원자폭탄 개발에 기여한다. 북한의 김일성과 어린 김정일까지 만난다. 정치 이데올로기의 무상함을 강조하기 위해 지나치게 작위적인 설정을 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키득키득 대며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설을 덮으며 나름대로 정리한 메시지는 두 가지다. 알란의 ‘오줌 슬리퍼’는 노년의 어쩔 수 없는 상징이다. 오줌발이 약해서 소변을 볼 때마다 슬리퍼를 적실 수밖에 없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알란은 평온한 노년의 삶에 안주하지 않고 길을 떠난다. 그런 도저한 낙관주의는 아무리 ‘젊은 노인’이 많은 100세 시대라지만 쉽지 않다. 또 하나는 한 시대를 오롯이 살아낸 노인의 역사는 그 자체가 미시 현대사로서 의미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알란이나 포레스트 검프처럼 반드시 현대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기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요즘 부모님 자서전을 펴내는 이들이 많아졌다. 평범한 개인의 자서전을 전문적으로 펴내는 출판사도 생겼다. 노인의 시행착오나 작은 성공은 기록으로 남길 만한 개인과 가족의 역사이자 현대사의 편린을 보여주기도 한다. 서울시도 부모의 인생사를 정리해 자서전을 내는 ‘천개의 스토리, 천개의 자서전’ 캠페인을 하고 있다.

지난 3주간 가장 인기를 끌었던 e글중심은 노인의 인천공항 피서를 다룬 글이었다. 무더위를 피해 인천공항으로 나들이 가는 노인들을 바라보는 젊은 세대의 불편한 시선을 다뤘다. 이 글에 달린 댓글 하나가 화제가 됐다. “늙어서 미안하다. 너희들은 절대 늙지 마라. 나도 내가 이렇게 늙을 줄 몰랐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도 있는데, 고작 무료 지하철 타고 인천공항 오가는 노인을 불편해하는 건 밴댕이 소갈머리다. 우리도 언젠가는 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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