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법원, 밤에는 그림…'주경야도' 7년만에 그림책 낸 실무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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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서 일하다 보면 다신 안 볼 것처럼 함부로 하는 사람들을 종종 봐요. 하지만 다시 볼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그렇지 않겠죠. 공간과 사람, 관계와 연결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제주지방법원 전준후 계장이 자신이 그리고 쓴 그림책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김상선 기자

제주지방법원 전준후 계장이 자신이 그리고 쓴 그림책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김상선 기자

12년차 법원 공무원 전준후(42·제주지방법원 근무)씨는 얼마전 그림책 작가가 됐다. 어느 곳보다도 절차가 중요하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딱딱한 곳, 법원에서 일하는 그가 펴낸 책 제목은 '팔딱팔딱 목욕탕'. 여름날 아빠를 따라 목욕탕에 간 어린이의 시선으로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그린 내용이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미대 진학에 실패한 뒤 법원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실무관이 됐다. 법원 실무관은 재판과 관련된 각종 서류를 송달하고, 재판에 직접 들어가 보조하고, 민원인을 응대하는 등의 일을 하는 '재판부의 살림꾼'이다. 전씨의 표현대로라면 "개미집처럼 복잡한 사무실에서 서류 더미를 처리"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세로 21cm, 가로 30cm인 A4용지가 앉은키만큼 쌓이는 일은 다반사다.

퇴근 후에는 가로 50cm, 세로 25cm짜리 도화지 한장에 매달렸다. 피곤한 날에도 "2시간씩은 꼭 그리자"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낮에는 수화기나 키보드를 붙들고 밤에만 붓을 잡는 '주경야도(晝耕夜圖)'라 진행 속도가 빠르진 않았다. 그림 한장을 완성하는데 꼬박 2주일 정도가 걸렸다. 출판사와 의견을 조율하느라 공정이 늦춰지기도 했다. '팔딱팔딱 목욕탕'은 그렇게 7년 만에 탄생한, 전씨의 첫 책이다.

전준후씨가 그린 법정 내 모습과 자신의 자리. 파란색으로 머리가 칠해진 사람이 판사이고, 그 앞으로 얼굴이 색칠돼 있는 안경쓴 남성이 실무관이다. 뒤로는 피고인석과 검사석, 증인석, 방청석이 있다. [전준후씨 제공]

전준후씨가 그린 법정 내 모습과 자신의 자리. 파란색으로 머리가 칠해진 사람이 판사이고, 그 앞으로 얼굴이 색칠돼 있는 안경쓴 남성이 실무관이다. 뒤로는 피고인석과 검사석, 증인석, 방청석이 있다. [전준후씨 제공]

일과 병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전씨는 오히려 일을 하며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민원인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우리가 올레길에서 만났으면 좀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요. 공간에 따라 사람들의 역할이 달라지니까요. 이번 책도 그런 공간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예요."

처음부터 동화책 작가를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2009년 자신이 근무하던 민원실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전국공무원미술대전에서 금상을 차지하면서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주는 즐거움을 느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너무 재밌더라고요.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도 많아지고요."

2009년 제 19회 전국공무원미술대전 서양화부문에서 금상을 탔던 전준후씨의 작품. 제목은 '3시에서 4시 사이 사무실'이다. 전씨는 "가장 시간이 안 가는 시간"이라고 했다.

2009년 제 19회 전국공무원미술대전 서양화부문에서 금상을 탔던 전준후씨의 작품. 제목은 '3시에서 4시 사이 사무실'이다. 전씨는 "가장 시간이 안 가는 시간"이라고 했다.

전씨는 법원 소식지에 만화를 연재하며 법원 직원으로서 느끼는 어려움과 고민들을 동료들과 나누기도 했다. '동굴'이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4컷짜리 만화에는 "민원인 입장에서 법원 일은 어두운 동굴을 통과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그동굴에 작은 촛불이라도 비추는 존재여야 할 텐데"라는 글을 곁들였다. 전씨는 "법원은 공장 같기도 하다"면서 "직원들이 사실 자기 일 말고는 잘 모른다. 민원인은 하나를 물어도 전체를 다 말해주길 원하는데 자꾸만 소극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지방법원 소식지(사보)에 전준후씨가 연재했던 만화.

제주지방법원 소식지(사보)에 전준후씨가 연재했던 만화.

제주지방법원 소식지(사보)에 전준후씨가 연재했던 만화.

제주지방법원 소식지(사보)에 전준후씨가 연재했던 만화.

제주지방법원 소식지(사보)에 전준후씨가 연재했던 만화.

제주지방법원 소식지(사보)에 전준후씨가 연재했던 만화.

그림에 빠지게 된 계기를 묻자 전씨는 조심스레 아픈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시절 아토피를 심하게 앓으면서 친구들에게 놀림도 받다 보니 외향적이었던 성격이 내향적으로 바뀌었어요. 그 때 주로 집에서 아버지가 사주신 대백과사전을 보면서 컬러로 된 온갖 그림과 설명들을 보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는 "예술가들은 '아픈 다리를 팔아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주워들은 적이 있는데 공감이 간다"고 말했다.

전씨는 다음 그림책은 어떤 내용으로 그리고 쓸지 행복한 고민 중이다. "사실 언제부터 그림을 그렸느냐는 말을 많이 듣는데, 우리 모두 어렸을 때 그림을 그렸어요. 저는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을 뿐이에요."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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