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여 가는 시민의 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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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얼마 전만해도 「짜증나는 서울교통」이라고 표현했다. 출·퇴근 시간이면 발을 굴렀고, 만원버스에 짜증을 부렸다. 그러나 이젠 그게 아니다. 기다렸던 버스마저 문도 열지 않은 채 달려가 버리고 정원의 3배나 넘는 전철은 아비규환이 되었고, 택시는 아예 줄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설령 요행히 차를 탔다 해도 기나긴 자동차 행렬은 움직이질 않는다. 짜증을 넘어 화가 나고 전천후 러시아워가 돼버린 지금, 집을 나서기마저 두려워 지게 되었다.
서울의 러시아워 평균속도가 시속 20km미만임은 이미 오래된 통계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91년에는 지금보다도 3배가 느린 7∼8km시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교통체증의 주범은 물론 1분에 한대씩 늘어나고 있는 차량에 비해 뒷걸음치고 있는 도로 율과 개선되지 않는 소통 율에 있다. 이러한 원인으로 발생되는 교통부문의 비용이 연간 3조3천1백억 원이라면 놀라운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중 기름 값이 34·7%를 차지하는 1조2천3백억 원이어서 교통 여건이 개선되지 않을 경우 기름 값 비중은 96년 39·8%(4조3천억 원), 2000년이면 8조5천억 원이라는 가공할 숫자로 늘어날 것이라고 에너지 경제연구원은 최근 발표했다.
교통체증은 시민에게 짜증과 불편을 넘어 막대한 경제적 손실까지 안겨준다는 지적이다.
서울의 교통체증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어서 교통당국의 주변에는 여러 갈래의 연구기관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러나 밤낮 연구만 하고 세미나만 하는 것인지, 그것이 현실화되어 눈에 번쩍 띄게 서울의 교통이 훤해 보인 적이 없었던 것은 웬일인가. 아니 한 두 번은 있었다. 서울 올림픽·아시안게임이 열릴 때, 그것도 시민들의 양식과 협조에 따라 이뤄진 홀·짝수 운행실시 때었을 뿐이다.
서울시민 한사람의 세 부담이 10만75원에 이르는 2조7천여 억 원의 방대한 예산을 맡고 있는 서울시가 시민의 발은 날이 갈수록 묶여만 가는데 무언가 속시원한 교통체증 해소책을 내놓은 적이 없다.
청문회다, 전임대통령 거취문제다 해서 나라 안팎이 시끌 법석이지만 시민의 민생을 책임지고 있는 공직자라면 이럴 때일수록 제자리에서 제몫을 성실히 수행해야할 것이다.
잦아진 집단시위로 도로가 점거되고 차량이 막힐 수도 있다. 이런 일시적 현상을 두고 탓하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은 접어두고라도 당장 시행할 수 있는 현실적 개선마저도 버려 둔 채 시민의 발을 묶어놓기만 하고 있는 당국의 무성의와 나태를 탓하는 것이다.
작게는 병목현상을 일으키는 지역에 대한 교통경찰의 집중배치에서부터 시작해 신호등의 연동·전자신호화 문제까지, 크게는 수도권 교통을 통합·총괄할 수 있는 기관의 설치에서 건축행정과 교통행정의 유기적 연계기능에 이르는 다양하면서도 다각적인 문제에 대한 종합대책이 마련되어야할 것이다.
천하대세만 논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가다가는 발 밑의 우물에 빠져 버린다. 꽁꽁 묶여만 가고 있는 서울 시민의 발을 어떻게 원활히 풀어 가느냐가 천하대세의 첫걸음이다. 큰 일만이 능사가 아니다. 불법 주차장이 돼버린 샛길의 단속 같은 작은 개선이라도 보여 달라는게 우리의 큰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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