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장자는 백제서 건너간 2∼3세″|이진희<일본명치대교수·좌일사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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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며칠 전에 일본의 고도 나라(나량)를 다녀봤다. 매년 가을에 공개되는 정창원의 문물 중 가야금 등 8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신라문물을 참관하고 후지노키 고분안에 들어가 우관속의 유물들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석관의 뚜껑을 연 것은 지난달 8일, 그간 석관내에 괴어있던 물을 뽑아내고 유물위에 쌓여있는 먼지를 제거하는 작업이 계속되었었다. 그리하여 1천4백년전 매장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발굴단장의 안내로 우실안으로 들어가자 2명의 조사원이 부식으로 유리된 금동영낙을 기록한 뒤에 건져 올리고 있었다. 석관 좌우 벽밑에 여섯자루의 대인가 놓여있었고 발쪽에는 금동제 신(이)두켤레와 허리띠(대), 그리고 금동관의 장식품으로 판정되는 유물들이 있었다.
피장자는 두 사람으로 20대 남성으로 추측되는 뼈는 비교적 잘 남아있었다. 다른 한사람은 금제 귀걸이와 옥제 목걸이의 위치로 보아 키가 작은 여성 또는 어린아이로 추측되었다. 뼈의 일부만 남은 것으로 보아 어린아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추측하는 근거는 침투한 빗물이 우관내부에 가득 찬 적이 있어 뼈의 일부와 영낙달린 통형동기둥이 떠다닌 흔적이 있으나 귀걸이와 목걸이는 자체의 무게로 하여 원위치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 속에는 합장이냐, 추장이냐를 두고 시비가 벌어지고 있지만 석관뚜껑을 한번 열었다 다시 덮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부장품 중에서 일본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대도의 모양과 장식인데 손잡이부분은 군대의 지시도 같으며 칼집 표면은 능형문양과 유리옥으로 장식돼있다.
「미와다마노 다치」로 불리는 이같은 형식의 대도가 천황가의 이세신궁의 신보에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 이같은 형식의 대도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능형문양은 백제의 입점리고분과 나주신촌리9호분 출토의 신에서 볼 수 있으며 대도 손잡이 밑에 불은 어패는 신라고분의 허리띠에 그 예가 많다.
필자가 먼저 주목한 것은 두켤레의 신이었다. 그중 하나엔 백제무령왕능에서 나온 신과 크기·장식의 양식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즉 연속귀갑문과 영낙으로 장식돼있는 것이다. 다만 귀갑문의 크기가 후지노키의 것이 다소 작을 뿐이다. 귀갑문의 장식이 있는 신은 백제계 유물이 많은 구마모토 켄(능목현) 후나야마(선산) 고분에 그 예가 있으며 후지노키의말안장에도 투각된 귀갑문이 특징적이다.
신 옆에 첩첩으로 된 금동장식품은 초섭문이 뚜렷하며 나주신촌리9호분에서 나온 금동관 장식을 방불케 한다. 그 바로 옆에 관의 두륜으로 보이는 장식품이 서 있어 거기에는 나주의 금동관과 같은 한줄의 영락이 달려있었다. 후지노키고분의 백제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관찰한 것은 표면에 노출된 부분이고 아직 먼지에 덮인 곳이 많으며 따라서 유물의 전모를 알아볼 수 없었다.
석관주변에서 이미 알려진 마패나 토기로 미루어 석관내부의 유물도 백제적 색채가 농후한 것이 예측되었지만 관과 신 등 장신구의 경우 백제제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유물을 건져낸 뒤의 정밀조사 결과가 기대된다.
또 잊어서는 안될 점도 있다. 첫째로 분구 주변의 발굴결과 일본의 전형적인 전방후원분이 아니라 원분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우실은 백제묘제인 횡혈식 석실이지만 석관은 일본식의 「가형우관」인 점이다. 따라서 피장자를 백제에서 건너간 1세로 보기는 어렵다. 아마 2세내지 3세일 것이다.
다음은 후지노키 고분이 일본열도에 백제의 선진문화가 이직되던 시기인 6세기 후반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백제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한 475년을 전후한 다난했던 시기, 백제 왕족과 귀족들이 수많이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6∼7세기에 오미(대신)로 활약하는 소아씨의 시조 목우치도 이 시기에 건너갔었다. 513년에는 무령왕이 오경박사·단양이를 파견하고 3년 뒤에 고안무와 교체시켰다. 그리고 성왕 때인 538년에는 불상과 경론을 보냈고, 553년에는 의·역·역부사서 파견하였었다. 그리하여 비조문화가 개화했던 것이다.
필자의 관심은 피장자가 누구인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후지노키 고분의 문물들이 백제가 고구려와 대결하면서도 중국남조와 신라·일본 등 동아시아 세계로 눈을 돌리던 시기의 산물이라는데 있다. 다시 말한다면 세계적인 넓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백제는 번영하였고 일본열도에까지 수많은 문물이 건너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백으로 돼 있는 6세기후반의 백제문화 해명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후지노키는 「오늘에 사는 우리들에게 세계전인 안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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