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군비경쟁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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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0일 국정연설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 AP=연합뉴스]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기세가 오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이번엔 '군사강국 러시아'를 들고 나왔다. 10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연례 국정연설을 하면서다. 푸틴 대통령은 "군비 경쟁의 종말을 얘기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러시아는 강한 군대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고 BBC를 비롯한 외신들이 보도했다. 푸틴은 "외부 공격에 대한 방어를 위해서는 물론 외국의 정치적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군사력 증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 "핵 전력 강화할 것"=푸틴은 한 시간 남짓 연설하며 상당 부분을 국방 분야에 할애했다. 핵심은 군비 증강이다. 그는 "러시아에 대한 외국의 압박에 맞설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며 "우리 군대가 강해질수록 이런 시도를 잘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구체적인 예도 들었다. "러시아 국방예산은 미국의 25분의 1 수준"이라며 "미국인들의 집(국토)이 그들의 '요새'인 것처럼, 우리 역시 집을 강하고 믿을 만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러시아는 냉전 시기 옛 소련의 실수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했다. 옛 소련이 엄청난 돈을 들여 미국과 군비 경쟁을 벌이다가 제 풀에 넘어갔다는 뜻이다. 푸틴의 대안은 비용에 비해 효과가 큰 핵무기다. 그는 "핵 억지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고 AP통신이 전했다. 푸틴은 또 "대륙 간 탄도미사일(ICBM)을 장착한 핵 잠수함 두 척을 곧 취역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소련 붕괴 뒤 핵 잠수함 퇴역은 많았지만 취역은 처음이다.

◆ "이란 공격 안 될 말"=애초에 전문가들은 푸틴이 연설에서 외교 문제에 집중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과 서유럽이 최근 러시아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여 왔기 때문이다. 딕 체니 미국 부통령이 "러시아가 민주주의를 퇴보시키고 있다"고 직설적으로 공격한 게 대표적이다.

그러나 푸틴은 정면대응을 삼갔다. 국방 분야를 제외하면 대부분 국내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 대신 모호한 어법과 비유로 미국을 에둘러 비난했다. 그는 우화의 한 토막을 들고 나왔다. "'늑대 동무'는 누구를 잡아먹을지 잘 알며, 공격할 때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사람들의 열정이 왜 자신들의 이익 앞에선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이냐"고 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체니의 이름을 거명하진 않았다. 그러나 AP통신은 "푸틴이 미국을 되받아쳤다(struck back)"며 "체니에 대한 은근한 비난으로 들린다"고 분석했다.

이란 핵 문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우선 "러시아는 핵 확산 방지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무력에 의존한 방법은 대부분 의도했던 결과를 내지 못하고, 심지어 애초 위협보다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때도 많다"고 덧붙였다. 물론 미국과 이란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다. 로이터통신은 이 대목과 관련해 "미국이 이란에 대해 어떤 군사 행동도 취해선 안 된다는 압박"이라고 지적했다.

◆ 인구 감소 우려=푸틴은 이 밖에 연설에서 인구 감소 문제를 비중 있게 언급했다. 그는 러시아 인구가 낮은 출산율과 이민 등으로 매년 70만 명씩 줄고 있는 것을 언급하며 "인구 증가를 위한 10개년 계획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그는 이를 위해 "내년부터 첫째 아이를 낳은 가정에 매달 1500루블의 육아 보조금을, 둘째 아이를 낳은 집엔 그 두 배를 지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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