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머피의 법칙' 작용하는 재벌 규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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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1970년대 1차 석유위기 때 미국은 에너지 절약을 명분으로 내걸고 연비 규정을 아예 법으로 의무화했다. 지금도 이 법은 살아 있어 한 생산라인에서 만들어지는 차들은 평균적으로 휘발유 1갤런당 27.5마일을 달려야 한다. 미국 기업들은 대형차와 소형차의 생산량 비율을 절묘하게 맞춰 이 규정을 지키고 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률은 높아졌다. 규정을 지키느라 차체가 가벼워졌고 충격을 덜 흡수한 탓이다. 미국 학자들은 차가 500파운드가량 가벼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때문에 추가로 사망한 사람이 연간 3000명이나 된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석유와 사람 목숨을 맞바꿨다는 지적마저 있다.

정부 규제란 이런 것이다.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부작용은 항상 생긴다. 규제로 얻는 이익보다 예상치 못한 후유증이 더 클 때가 많다. 정부 규제에도 '머피의 법칙'이 작용한다는 얘기다. 한번 꼬이면 계속 잘못되듯이 규제는 항상 정부가 약속한 것보다 비용은 더 크고 효과는 작은 법이다.

문어발식 확장을 막겠다며 약 20년 전에 도입한 재벌 규제도 명분은 그럴 듯했다. 에너지 절약에 비할 정도야 못 되지만, 팽배한 반(反)기업 정서에 딱 들어맞았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오너가 계열사 돈으로 새 사업을 벌이는 행태를 제한했다. 일정 규모 이상 그룹들을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지정한 뒤 순자산의 25% 이상을 출자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출자총액제한제(출총제)의 시작이다.

그러는 사이 부작용이 속출했다. 투자가 부진해졌다. 여기저기 건드려 봐도 수종(樹種)산업 하나 건질까 말까 한 판국인데 투자를 하지 않으니 미래 유망 사업이 나올 리 없다. 소버린과 같은 외국 투기자본들이 설쳐도 출총제로 발목 묶인 그룹들은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있다.

훗날 연비 규정은 에너지 절약이란 고상한 명분 때문에 만든 게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외국 자동차의 대미 수출을 억제하는 게 진짜 목적이었다. 미국에 공장을 세우도록 유인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미국 학자들이 그렇게 분석하고 있다.

재벌 규제의 진짜 목적도 나중에 드러났다. 그룹 총수의 지배권 약화가 본심이었다. 90년대만 해도 정부는 오너들이 주식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고 비난했다. 주식을 분산하면 출총제 대상에서도 빼줬다. 하지만 지금은 지분이 별로 없는 오너가 경영을 전횡(專橫)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계열사 지분은 빼고 자신의 실제 소유 지분만큼만 경영권을 행사하라고 몰아세운다. 결국 목적은 오너 경영의 해체였단 얘기다. 정부가 시킨 대로 한 재벌들이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덴 이렇듯 이유가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설립된 지 올해로 25주년. 때마침 선장도 얼마 전 바뀌었고 창립 25주년 기념 세미나도 열었다. 신임 권오승 위원장은 과거 공정위의 성과와 실적을 냉정하게 평가하겠다고 말한다. 나아가야 할 방향도 근본적으로 모색하겠다고 한다. 바람직한 일이다. 공정위가 반성하는 모습을 좀체 본 적이 없었던지라 의외로 생각될 정도다.

그게 진심이라면 우선 출총제 등 재벌 규제를 공정위 업무에서 떼내야 한다. 그게 새로운 모색의 시작이어야 한다. 공정위는 경쟁 촉진이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면 된다. 기업 소유구조야 오너 경영이든, 2세 승계든, 또는 지주회사 설립이든 공정위가 개의치 말아야 한다. 누가 기업을 소유하고 지배권을 갖는지는 기본적으로 정부의 규제 대상도 아니다. 세금 문제라면 국세청에, 금융 문제라면 금감위에 맡기면 된다. 공정위는 경쟁 촉진이라는 본연의 업무가 있다.

김영욱 경제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