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일본의 소탐대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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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최근 일본의 행태를 보면 미.일 동맹 강화 추세와 2003년부터의 경기 회복을 배경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영유권 문제를 표면화해 소위 '보통 국가'로 가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일본이야말로 외교를 국내적 정치 목적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일본이 수로 측량 문제의 제기로 독도 문제 분쟁화에 성공, 실리를 챙겼다고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상궤(常軌)를 벗어난 일본의 행위는 다음 이유로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 할 수밖에 없다.

첫째, 한국은 100년 전 자강(自彊)하지 못하고 국제 정세에 어두워 국망(國亡)을 당한 쓰라린 과거를 딛고 세계 10위의 경제력과 민주화를 일궈냈다. 일본의 최근 행동은 이런 기적을 이룩한 한국민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와,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을 바탕으로 미래 지향적 한.일 관계 구축을 위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채택한 바 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이웃 나라에 고통을 준 전쟁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순국자 영전에 참배한다"는 궤변에 이어 수면 하의 독도 영유권 문제를 새삼 부각시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놓았다. 일본은 한국인의 마음을 추스르지 않고는 성숙한 지도 국가가 될 수 없다. 미국이 전쟁 중 점령한 도서를 모두 반환함으로써 일본이 미국을 믿고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일본 스스로 잊고 있다.

둘째, 대한해협을 사이에 둔 두 나라는 역사적 경험을 달리하고 있다. 대륙과 해양 세력의 흥망성쇠에 따라 온갖 고초를 당해 온 한국인과 달리 이민족의 혹독한 지배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일본인은 국제 정치의 냉혹함에 대한 전략적 인식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한반도가 대륙에서 발생한 온갖 풍파를 막아줌으로써 값을 매길 수 없는 혜택을 받아 왔고 받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근세에 잠시 위세를 떨쳤던 일본이 그 배경을 메이지유신의 선각(先覺)에서만 찾고 있는 것은 '착각과 환상'이다. 이제 한국은 정보기술(IT) 등 특정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21세기에는 일본을 능가하는 국력을 가질 수 있는 국가가 됐다. 국제정치에서도 분명한 독립변수로서 생존과 번영의 외연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현재의 경제적 우위를 자만한 고이즈미 총리가 한국이 후회할 것이라고 한 말이 '실언'이었음이 입증될 날이 올 것이다. 일본은 '역지사지(易地思之)'하지 않음으로써 '큰 것'을 잃고 있다.

한.일은 21세기의 전환기에 동북아의 새로운 판을 짜야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일본의 그릇된 역사인식으로 '동북아 협력 공동체' 형성은 물거품이 돼 가고 있다. 일본 속담에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잘못된 역사 인식으로, 오염된 흘러간 물로 어찌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는가? 올바른 역사 인식으로, 맑아진 새로운 물로 물레방아를 쉼없이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정태익 경남대 북한대학원 초빙교수 전 외교안보수석·주러시아 대사